성심수녀회 관구장 최혜영
사랑하는 김재순 수녀님,
dol2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이 결코 만만치 않다며 비우고 또 비우고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삶의 투쟁을 다하시다가 마침내 하느님 품 안에 고이 안기신 우리의 수녀님! 수녀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가족들, 제자들, 성심수녀들이 수녀님을 마지막으로 떠나 보내며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기 위해 여기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수녀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를 느끼게 해 주셨던 수녀님, 그토록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지만 수녀님을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는 저희들의 마음은 탯줄 떨어진 아이처럼 가슴이 철렁하고 막막하기 그지 없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성심수녀회의 첫 번째 한국인 회원으로서 수도회의 55년 역사 안에서 큰 버팀목이 되어주셨습니다. 저희는 수녀님을 뵐 때마다, 마지막 병상에서까지도 “수녀님은 참 대단한 분이시다”라고 감탄할 때가 많았습니다. 미국 켄우드 수련원 동기들과 그 후 수녀님을 만난 많은 외국의 성심수녀들은 한국하면 김재순, 김재숙수녀님을 떠올리며 안부를 전하셨고, 수녀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기에 얼마나 큰 감사와 자랑스러움으로 마음 뿌듯했었는지요. 성심수녀회가 한국 땅에서 이만큼 뿌리내릴 수 있었던 데에는 수녀님의 노고가 얼마가 컸었던가를 기억하고 또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언제나 흐트러짐 없이 생활하시며 “하느님만이 전부라는 진리”를 한결같은 믿음으로 보여주셨던 성실한 신앙인이며 수도자의 모범이셨습니다. 멀리 외국을 다녀오셔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같이 일어나 기도하는 분이셨고, 연세가 드신 후에도 수녀들의 전체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셔서 곁에 계시기만 해도 든든한 진정한 원로셨습니다. 수녀님의 첫서원 50년을 축하하는 금경축 자리에서 수녀님께서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당신의 가족사 안에서 고스란히 끌어안으셔야 했던 고통과 신앙의 갈등을 나눠 주셔서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그간 수녀님의 고통이 얼마나 절실했을지 저희로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겠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 수녀님의 삶이 정화되었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더 너그러워지고 평화로와지셨음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녀님께서는 어떠한 갈등 속에서도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두셨고, 복음의 가치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젊은 시절부터 대학의 중책을 맡으시며 쉼없이 성심교육에 헌신하셨지만, 언제나 그 기준은 “일이 아니라 사람” 중심이었습니다. 초창기 외국 수녀님들의 실책으로 빚어진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많은 고생을 하셨을 때도 선배들을 원망하거나 탓하기보다 그 시대에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 줄 알았을 것이라며 시대의 한계 속에서 너그러이 이해하고 용서하며 훌훌 털어버릴 줄 아셨습니다. 춘천 성심여대를 마감했던 시점에도 “학생과 교직원들이 경춘가도를 오가며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을 늘 하느님께 감사하셨고, 1988년 가톨릭대학교와 통합을 추진하다가 학생들의 반대시위로 모든 계획이 무산되었을 때도 당신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으셨지만,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학생을 다치게 할 수는 없다며 물러서셨고, 1995년 가톨릭대학교와 통합이 되었을 때 “하느님의 시간은 따로 있다”며 지나간 일들에 마음을 묶어 두지 않으셨습니다.
수녀님께서는 한국 성심수녀회의 초창기 회원으로서 “당신 자신이 길”이 되어 후배들이 따를 수 있는 모범이 보여 주셨으며, 당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면 평생 큰일 작은 일 가리지 않으시고 인내와 희생으로 받아 안아 주셨습니다. 팔순이 넘으신 연세에도 성심학교, 가톨릭대학교 개교기념일이나 동창모임에 참석하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고, 또 먼지나는 옛 문서들을 뒤적이며 성심수녀회 한국관구 50주년 역사인 <엠마오의 길>을 편찬해 주셨고, 병상에 눕기 직전까지 후배들을 위해 고문서를 정리하시고 영어 편지를 작성해 주시는 등 숨은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지난 12월 7일부터 병상에 누워 생활하셨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도 제자들을 만나 자애로운 사랑을 드러내시고, 찾아와준 수고에 감사하셨고, 당신을 간호하고 기도해 주는 수녀들에게도 거듭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습니다. 끝까지 정갈하게 자신을 지키시며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을 사명에 충실하셨던 수녀님, 수녀님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아직도 하실 일이 많으신데, 후배들을 위해 방패막이 되어 주실 일들이 아직도 많은데, 크고 작은 일에 달려가 의논할 곳이 없어진다는 허전함에 한국성심수녀회의 역사가 바뀌는 아픔을 느끼지만, 더는 수고해 주십사 붙잡아서는 안 될 하느님의 시간을 느낍니다.
수녀님, 시대의 아픔에, 가족의 고통에, 척박한 한국땅에 수도회의 초석을 놓으시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 수녀님, 감사합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다.”(루카 16,10)는 성경 말씀처럼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예수 성심의 영광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셨던 수녀님을 성심수녀회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자랑스러운 회원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영원히 누리시기 기원하며 당신을 사랑하는 성심수녀들이 마지막 감사 인사 드립니다. 사랑하는 수녀님,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평안히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