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보다 일찍 태어난 소피이는 나이에 비해 작고 말라서, 교리 시간에는 의자 위에 올라서야 신부님 눈에 띌 정도였다. 몸집은 작았어도 어린 소피이는 활달했다. 성격은 세심한 편이나, 그녀가 보이는 즉각적인 반응들은 충동적이었다. 소피이 바라는 늘 똑부러지게 대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녀는 놀기를 좋아했고, 언덕에 나가 걷는 것을 즐겼다. 주위 사람들과 쉽게 친해졌고 자연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낼 줄 알았다.
무엇보다도, 어머니 덕분에 어린 소피이는 다른 사춘기 소녀들이 받을 수 없었던 교육을 받았다. 소피이는 10살 되던 해부터, 11살 위의 루이 오빠에게 맡겨져, 엄격하면서도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 매우 총명한 소피이는 루이가 가르치고 있는 쥬앙니 중학교 교과 과정을 집에서 그대로 이수했다. 그리하여 소피이는 고대사와 현대사, 성서, 라틴어, 수학, 그리이스어, 물리학 히브리어 초급, 돈키호테를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 등을 배웠다. 이는 소피이에게 독서를 하며 새로운 사고를 하는 것에 대한 흥미를 북돋아 주었고, 차차 교육자로서의 사명을 자신의 몫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소피이는 또한 다섯 살 때,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결심하는 조숙함을 보이기도 했다. 1789년에 첫영성체를 했고, 열렬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하여 매일 아침 성 티보 성당 미사에 참례하곤 하였다. 14살에는, 동정 서원을 하기로 결심했다. 루이 바라가 파리에 머물면서 예수성심과 성모성심 그림을 보내 주기도 하는 등의 중간 역할 덕분에, 바라 가족은 좀 더 일찍 얀센주의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바라 가족은 매일 기도하려고, 하느님 신비의 다른 면을 보여주는 이 그림들 앞에 모이곤 했다.
혁명은 바라 가족의 삶을 혼란스럽게 했다. 교황청이 혁명 입법을 반대하여, 그 법에 동의하는 성직자들을 파문하겠다고 했을 때, 루이 바라는 이미 했던 국가와 국왕께 대한 동의 선서를 취소했다. 이는 대단히 위험스러운 일이었으므로, 루이 바라는 남 몰래 다비예 거리에 있는 다락방 한 구석에 한 동안 몸을 숨겨야 했다. 바라 가족의 재산은 차압당했고, 루이는 가족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여 파리로 피했으나, 결국 1793년 5월에 체포되었다.
그는 기적적으로 단두대 처형을 면했다. 그때 소피이는 어머니가 기운을 차리도록 도우며, 강한 의지력을 보였으나, 이 불안한 나날을 통해 ‘혁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대결하는 증오의 때’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1840년에 프랑스 혁명 때 부르던 노래 ‘라 마르세이예즈’ 에 그녀는 늘 몸서리쳤으며, 1840년과 1848년에는 공포정치에 반대하는 대중 시위에 참가했다.
1795년 1월에 석방된 루이 바라는 1795년 9월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어린 누이가 파리에서 그의 지도 아래 신앙생활과 학업을 계속 연마하도록 쥬앙니를 떠나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소피이는 약하게만 느껴지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또한 구체적인 길을 모르면서도 마음속에 막연히 지녀왔던 수도생활에 대한 소망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녀가 떠날 수 있도록 격려했다. 소피이는 1795년 9월 거룻배를 타고 쥬앙니를 떠났다.
오빠는 그녀를 투렌느가 2번지(현재 생통쥬가 4번지)에서 살게 했고, 그곳에서 비밀리에 미사를 드리곤 했다. 소피이는 그 지역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몇몇의 소녀들과 더불어 신앙교육과 일반 교육을 계속 받았다. 그녀는 가르멜 수도생활을 꿈꾸었으나, 성체 흠숭과 여성교육, 즉 내적 생활과 사도적 활동을 연결시켜, 새로운 형태로 성심 공경을 하는 영성을 지닌 수도생활에 관한 영감을 받았다.
1800년 가을에, 봐랭 신부님과의 결정적인 만남이 있었다. 그는 망명에서 돌아오면서, 예수 마음의 사랑을 전하는 수단으로 여성교육에 헌신하고자 세워진 여자 수도회인 ‘예수의 사랑받는 자매회’를 프랑스에 알리고자 했다. 1800년 11월 21일, 소피이 바라는 투렌느가의 기도방에서 첫서원을 했다. 1년 뒤, 1801년 11월 13일 피카르디 출신의 두 여성, 앙리에트 그로지예와 쥬느비예브 데에와 함께 첫 공동체를 이룬 것은 아미엥에서 였고, 이로써 독창적인 사도적 수도생활의 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소피이 바라의 삶은 1801년부터 조금씩 수도 생활과 하나로 엮어져 갔다. 1802년 12월 21일, 그녀는 아미엥의 원장이 되었다. 그녀의 인간적, 영적 자질은 이미 충분히 인정되어, 사람들은 그녀가 수도회를 이끌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바라 수녀는 통치하는 일에서나, 개인적인 생활면에서 독립성과 상호의존성의 조화를 잘 이루면서, 신중하고 확고한 자질을 발휘하였다.
그녀는 서로 사랑하는 기쁨이 어린 공동체의 삶을 창출할 줄 알았기에, 훗날 ‘예수 마음 안에 한 마음 한 뜻’을 성심회의 좌우명으로 삼게 되었다. 기숙학교와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통학학교라는 두 가지 형태의 학교에서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실현된 성심의 독특한 사도직은 바로 아미엥에서 시작되었다. 바라 수녀가 처음부터 수도원적 삶의 형태를 이룰 생각을 지닌 것은 아니었으나, 수도회의 삶은 매우 관상적이었다.
초기에 이 새 공동체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예수의 사랑받는 자매회와는 정치적 이유로 갈라서야 했다. 제 1제정 치하에서 해체당할 염려 때문에 ‘성심’ 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었고,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 라는 이름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1804년부터, 성심회가 프랑스 안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방문회의 옛 수련자였던 필리핀 뒤셴이 생활하던 그르노블의 쌩뜨 마리당 오 수녀원이 처음으로 성심회와 통합했다. 1806년 바라 수녀는 26세의 나일 원장이 되었는데, 이는 종신직이었다. 그리하여 바라 수녀는 거의 반세기 동안 프랑스와 유럽을 두루 돌아다니며 공동체를 세우기도 하고, 통합을 희망하는 수도원들을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서로의 일치를 강화하고 돈독히 하였다.
1807년, 갓 태어난 성심회는 앞으로 6년간 지속될 위기의 시작으로 흔들렸다. 이 갈등이 사도적 활동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으나, 성심회의 은사와 통치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바라 수녀의 권위를 거부하는 수녀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들은, 성심을 영성의 기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성심에 봉헌하는 것을 반대하고, 삶의 형태를 결정짓는 이냐시오식 전통에 도전했다. 어떤 수녀들은 성심회의 근본정신이 되는 성심회의 은사와 그 정신을 실현하는 방법인 청소년 교육을 혼동하였다. 181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성심회의 창립 정신을 되살려낼 수 있었다. 왕권의 부흥은 성심회의 은사와 존재의 뿌리를 나타내는 ‘성심’이라는 이름의 사용을 허락했다. 1815년 12월 16일의 회헌의 채택은 복잡하게 얽힌 법적 지위를 확실히 하고, 성심회의 삶을 구성하는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1826년 12월 회헌에 대한 교황청의 인가를 받았다.
이때부터 성심회는 확장되기 시작했다. 먼저 프랑스에서는 주교들과 몇몇 부자들의 요구에 따라, 성심회를 승인한 국가의 배려에 힘입어 1827년 수녀원과 학교들이 세워졌다. 1818년, 성심회는 프랑스 바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필리핀 뒤셴과 함께 몇몇의 수녀들이 배를 타고 루이지애나에 갔다. 같은 해에 사부아(Savoie)에서 성심회의 설립을 요청했고, 이어서, 이탈리아, 벨기에, 아일랜드, 영국, 알제리, 오스트리아의 폴란드 구역, 티롤(Tyrol), 스페인, 웨스트팔리(Westphalie), 네덜란드에 공동체를 세웠다. 마들렌 소피이 바라의 총원장 기간 내내, 미국과 캐나다에 북아메리카 분원들이 많이 생겨낫고, 카리브 해를 그 첫 관문으로 하여 남아메리카 지역까지도 차례로 퍼져 나갔다. 창립자의 소망에 따라 북돋워진 이런 확장은 예수 마음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맞설 각오가 되어 있는 수녀들 덕분에 가능했다.
이런 확장은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수녀들은 유럽 여러 나라의 자유주의적 경향과 혁명적인 움직임들의 표적이 되어, 북이탈리아와 스위스로부터 여러 공동체가 떠나와야만 했다. 반면, 이런 강압적이며 고통스러운 철수는 프랑스, 아메리카, 유럽 다른 나라들, 그리고 새로운 선교지에 새로운 공동체들을 설립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심회의 지역적인 확장이 기숙학교에 의해 이루어진 성공을 의미한다면, 처음부터 그리스도 마음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지구 끝까지라도 가겠다고 한 마들렌 소피이 바라, 창립자의 은사가 구현된 것이라 하겠다. 이는 또한 성심회 회원들에게 다른 문화들을 접하도록 하며, 개방성과 관대함으로 초대되는 기회였다. 회원의 증가 역시 놀랄 만했다. 기숙학교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회원이 필요했는데, 또한 이 기숙학교들의 사도적 활동 자체가 많은 성소를 낳았다. 그런데도 끊임없는 공동체 설립의 요청에 모두 응답하기에는 부족했다.
예수 마음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고유한 방법들이 점차 다양해졌다. 기숙학교들이 반 기숙생들을 받아들였다. 특수학교들이 장애자, 고아, 소년들을 위해 문을 열었다. 수녀들은 재봉교실을 열었고, 어른들도 받아들였으며, 초등학교 교사들을 준비시켰다. 1818년부터, 기숙사 내에 ‘마리아의 자녀들’이라는 신심 단체를 만들어, 열렬하며 성실한 영성 생활에 친숙해지도록 학생들을 도왔다. 1832년부터는 졸업생들이 정기적인 피정을 통해 모였다.
마들렌 소피이 바라는 계속 확장되는 수도회가 진정 한 몸을 이루도록 이제 어느 때보다도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특별히 어마어마한 편지(현재 보존되고 있는 편지는 14,000통) 왕래와 정기적인 회람을 통해서 수도회를 하나로 엮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같은 곳에서 수련을 받도록 수련원을 한 곳에 마련하고, 종신서원 전에는 몇 개월간 총원장 옆에서 보내도록 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급속도의 확장에도 성심회 안에 수도회 붕괴의 조짐은 없었다. 유럽과 미국에 점차 뿌리를 내리면서, 회헌 및 모원의 장소에 관한 재검토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람들은 통치 양식의 변화가 필요하며 모원을 로마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성심회의 회헌이 예수회의 회헌과 같은 맥락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생긴 불화가 1839년부터 1843년까지의 대위기를 일으켰다. 이 위기 동안, 마들렌 소피이 바라는 자신의 지위를 존중받지 못했으며, 자신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 법령들을 수도회에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의 참사회도 분열되었다. 위기는 성심회의 구조 변화에 호의적이지 못한 정부와 프랑스의 주교들과의 갈등 대문에 더욱 복잡해졌다. 프랑스와 다른 나라 분원들 사이의 분열을 가까스로 모면했을 정도였다. 바티칸으로부터 해결책이 나왔다. 1843년 3워 4일, 교황청 성성은 1839년 법령을 취소했다. 총원장의 만류에도 4명의 총참사 중 2명이 해임되었다. 성심회를 떠난 수녀는 아무도 없었으나, 이 위기는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며 그 흔적을 남겼다.
그 뒤 몇 달이 지나고, 다시 몇 년이 지나면서, 마들렌 소피이 바라는 권위를 되찾았다. 그녀는 수도생활에 새로운 활기를 찾도록 애썼다. 젊은 수녀들이 순명의 정신을 존중하도록 양성할 것을 당부하면서, 모든 수녀들에게 처음의 근본정신을 다시 되살려 주고자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한 몸’이 되는 일치의 정신은 기도와 청빈이라는 소중한 미덕을 실제로 살지 않으면, 얻지 못할 귀한 열매였다. 이러한 재창건의 노력이 효과를 거두었고, 수도회의 확장은 계속되었다. 마들렌 소피이 바라가 1865년 5월 25일 예수승천대축일에 세상을 떠났을 때 성심회의 회원을 3,539명이었으며, 유럽에 64개, 미국과 캐나다에 20개, 쿠바에 2개, 남미에 3개의 공동체가 있어, 전부 89개의 공동체가 있었다. 바라 수녀는 말년에, “예수님께서 맡겨 주신 앞날을 위해 성심회를 더욱 굳건히 하면서, 성심회가 시대의 필요에 성실히 응답할 수 있도록” 최선을 기울여 끝까지 헌신했다.
국제 수녀회로 발전하며..
새로운 출발
– 1950년대 말부터 성심회는 역사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선교의 열정 : 이 당시에는, 선교에 대한 유례없는 열정이 주목할 만했다. 동유럽, 아시아와 쿠바에 세워진 공산주의나 마르크시즘 계열의 체제 대문에 많은 어려움을 격고도 성심회는 한국과 대만에 진출했다. 이러한 선교 열정은 우간다, 챠드, 케냐에 이르렀다. 선교를 위한 노력은 공동체 설립에 중요한 몫을 했으며, 뿐만 아니라 젊은 평신도들을 교육하여 제 3세계의 여러 나라로 파견하는 일로 연결되기도 했다. 선교에 대한 열렬한 협력이 졸업생들과 함께 이루어졌는데, 졸업생들은 1960년도 로마 세계 총회에서 처음 서로 만났고, 1965년 브뤼셀에서 세계 성심 동창회를 발족시켰다.
1960년 인도에서는 처음으로, 수녀들이 ‘천민’들이 사는 시골 본당인 ‘하리가운’에서 살 기 시작했고, 1965년에는 안데스 산맥의 인디언 마을, ‘하엔’에 들어가 살았다. 1963년에 는 수녀들이 시리아 수도원을 떠나, 바르셀로나의 ‘베소스’라는 빈민 지역에 정착했다.
2. 구조의 변화 : 성심회의 총원장 사빈느 드 발롱 수녀는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관자로 참석했고, 공의회가 다 끝나기도 전인 1964년도 성심회 총회는 젊은 수녀들의 공부를 위한 새로운 체제를 마련하고, 수녀원 내의 수녀들의 신분 구별을 없앴으며, 봉쇄를 폐지했다.
이제부터 성심회의 특징적인 모습이 발달했다. 큰 기숙학교들이 문을 닫았다. 교육 과정이 단일화 되고 학교들이 없어지자, 교육기관에는 새로운 생명력이 생겼다. 라틴 아메리카와 이집트,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도 수녀들이 대도시의 가난한 지역의 복음화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야학과 후원회를 조직하고, 시골의 소외된 지역에 공동체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떻게 ‘시대의 징표’에 응답해야 하는가를 모색한 것은, 1967년 총회에서였다. 드 발롱 수녀가 총원장직을 사임한 후, 총원장의 종신직 임기 폐지와 새로운 행정 조직은 실제적인 통치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점차로 공동책임을 강조하고 지역 특성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미묘한 시기에 조세파 불토 수녀는 성심회가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도록 재촉하면서도 단순한 마음으로 성심회의 일치를 유지할 줄 알았다.
3. 사도적 삶의 쇄신
교육에 대한 전망이 점차 넓어졌고, 세상 속으로의 개입도 다양해졌다. 수녀들은 새로운 지역에서 인간의 통합적인 성장을 위해 일했다. 1970년 총회 덕분에, 성심회는 한 중심, 즉 그리스도의 마음에 중심을 두기 위한 5가지 선택을 심화했다. 그것은 ‘공동과 나눔’의 정신, 일치를 사는 ‘국제 공동체’, 교회를 위한 봉사로 재확인 된 ‘교육적 사명’, ‘제 3세계와의 연대’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 이다. 총원장 마리아 들 라 콘셉시온 카마초 수녀의 재임 기간(1970~1982)에, 성심회는 급변하는 시대에 역행하며 이 5가지의 선택을 살았다. ‘관상적인 안목’ 으로 키워진 식별과 기도에 바탕을 둔 강한 영성적 도약으로 수녀들은 새로운 삶의 형태를 지행하게 되었다. 봉쇄의 폐지와 가장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위한 고민은 세상과의 관계를 새롭게 했고, 공동체가 세상 속에 끼어 들어가 살 것을 요청했다. 곳곳에서 소공동체들이 생겨났다. 총참사회는 모든 관구들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분출하는 이러한 노력과 움직임들을 지지해 주었다. 1979년 멕시코 관구장 회의에서는 현시대의 발전은 ‘신앙에 바탕을 둔 정의 교육’에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의식했다.
헬렌 맥러플린 총원장(1982~1994) 수녀는 국제교육위원회로 하여금 이를 계속 성찰하도록 했고, 상호 소통과 대화를 위한 통치를 했다. 매우 자율적인 작은 공동체 설립들은 성심회 수녀들을 인도네시아, 니카라구아, 파라과이, 모스코바, 중국 등 새로운 곳에 살게 했다. 공산주의의 몰락과 공산주의 계열 국가들의 체제 변화로, 성심회는 다시 헝가리와 쿠바로 돌아갔다. 1982년도 총회는 새 회헌을 만들었고, 교회와 오랜 시간 유익한 대화를 나눈 후, 비로소 1988년 새 회헌이 통과되었다.
성심회의 국제성을 더욱 잘 살고자 하는 소망이 캐나다에서의 1994년도 총회에 반영되었다. 이 총회 중에 유럽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최초의 총원장으로 파트리시아 가르시아 데 퀘베도 수녀가 선출되었다.
– 프랑스, 모니크 뤼라르 수녀
새로운 출발
– 1950년대 말부터 성심회는 역사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선교의 열정 : 이 당시에는, 선교에 대한 유례없는 열정이 주목할 만했다. 동유럽, 아시아와 쿠바에 세워진 공산주의나 마르크시즘 계열의 체제 대문에 많은 어려움을 격고도 성심회는 한국과 대만에 진출했다. 이러한 선교 열정은 우간다, 챠드, 케냐에 이르렀다. 선교를 위한 노력은 공동체 설립에 중요한 몫을 했으며, 뿐만 아니라 젊은 평신도들을 교육하여 제 3세계의 여러 나라로 파견하는 일로 연결되기도 했다. 선교에 대한 열렬한 협력이 졸업생들과 함께 이루어졌는데, 졸업생들은 1960년도 로마 세계 총회에서 처음 서로 만났고, 1965년 브뤼셀에서 세계 성심 동창회를 발족시켰다.
1960년 인도에서는 처음으로, 수녀들이 ‘천민’들이 사는 시골 본당인 ‘하리가운’에서 살 기 시작했고, 1965년에는 안데스 산맥의 인디언 마을, ‘하엔’에 들어가 살았다. 1963년에 는 수녀들이 시리아 수도원을 떠나, 바르셀로나의 ‘베소스’라는 빈민 지역에 정착했다.
2. 구조의 변화 : 성심회의 총원장 사빈느 드 발롱 수녀는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관자로 참석했고, 공의회가 다 끝나기도 전인 1964년도 성심회 총회는 젊은 수녀들의 공부를 위한 새로운 체제를 마련하고, 수녀원 내의 수녀들의 신분 구별을 없앴으며, 봉쇄를 폐지했다.
이제부터 성심회의 특징적인 모습이 발달했다. 큰 기숙학교들이 문을 닫았다. 교육 과정이 단일화 되고 학교들이 없어지자, 교육기관에는 새로운 생명력이 생겼다. 라틴 아메리카와 이집트,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도 수녀들이 대도시의 가난한 지역의 복음화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야학과 후원회를 조직하고, 시골의 소외된 지역에 공동체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떻게 ‘시대의 징표’에 응답해야 하는가를 모색한 것은, 1967년 총회에서였다. 드 발롱 수녀가 총원장직을 사임한 후, 총원장의 종신직 임기 폐지와 새로운 행정 조직은 실제적인 통치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점차로 공동책임을 강조하고 지역 특성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미묘한 시기에 조세파 불토 수녀는 성심회가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도록 재촉하면서도 단순한 마음으로 성심회의 일치를 유지할 줄 알았다.
3. 사도적 삶의 쇄신
교육에 대한 전망이 점차 넓어졌고, 세상 속으로의 개입도 다양해졌다. 수녀들은 새로운 지역에서 인간의 통합적인 성장을 위해 일했다. 1970년 총회 덕분에, 성심회는 한 중심, 즉 그리스도의 마음에 중심을 두기 위한 5가지 선택을 심화했다. 그것은 ‘공동과 나눔’의 정신, 일치를 사는 ‘국제 공동체’, 교회를 위한 봉사로 재확인 된 ‘교육적 사명’, ‘제 3세계와의 연대’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 이다. 총원장 마리아 들 라 콘셉시온 카마초 수녀의 재임 기간(1970~1982)에, 성심회는 급변하는 시대에 역행하며 이 5가지의 선택을 살았다. ‘관상적인 안목’ 으로 키워진 식별과 기도에 바탕을 둔 강한 영성적 도약으로 수녀들은 새로운 삶의 형태를 지행하게 되었다. 봉쇄의 폐지와 가장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위한 고민은 세상과의 관계를 새롭게 했고, 공동체가 세상 속에 끼어 들어가 살 것을 요청했다. 곳곳에서 소공동체들이 생겨났다. 총참사회는 모든 관구들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분출하는 이러한 노력과 움직임들을 지지해 주었다. 1979년 멕시코 관구장 회의에서는 현시대의 발전은 ‘신앙에 바탕을 둔 정의 교육’에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의식했다.
헬렌 맥러플린 총원장(1982~1994) 수녀는 국제교육위원회로 하여금 이를 계속 성찰하도록 했고, 상호 소통과 대화를 위한 통치를 했다. 매우 자율적인 작은 공동체 설립들은 성심회 수녀들을 인도네시아, 니카라구아, 파라과이, 모스코바, 중국 등 새로운 곳에 살게 했다. 공산주의의 몰락과 공산주의 계열 국가들의 체제 변화로, 성심회는 다시 헝가리와 쿠바로 돌아갔다. 1982년도 총회는 새 회헌을 만들었고, 교회와 오랜 시간 유익한 대화를 나눈 후, 비로소 1988년 새 회헌이 통과되었다.
성심회의 국제성을 더욱 잘 살고자 하는 소망이 캐나다에서의 1994년도 총회에 반영되었다. 이 총회 중에 유럽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최초의 총원장으로 파트리시아 가르시아 데 퀘베도 수녀가 선출되었다.
– 프랑스, 모니크 뤼라르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