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기억한다 함은, 성령과 역사의 그 순간에 뿌리를 두고, 우리의 경험이 새로운 세기의 도전들에 힘차게 직면하게 하는 새로움으로 우리 자신들을 개방하기 위하여 우리의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기억은 과거에 중요했던 것들-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던-을 현재화시킵니다. 기억은 여성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기억은 지나간 사건들을 현재로 데려와서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기억은 우리의 마음 안에 지나간 사건들을 간직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우리의 현재 경험 안으로 포함시켜 우리가 점점 지혜로워지도록 도와줍니다: 마리아는 마음속에 그 모든 것들을 간직하였다. (루카 2,48-51) 그것은 감사를 드리기 위해 과거를 현재로 기쁘게 맞아들이는 마음의 기억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사건들을 생생하고 살아있게 하여, 그 사건들이 미래를 향한 기준점과 자극이 되도록 합니다.
패트리샤 가르시아 드 퀘베도 수녀님의 2000년 5월 25일 편지에서
성심수녀회는 1800년 창립되어 2000년에 200주년을 맞이했다. 그리고 성심수녀회는 1956년 한국에 진출하였고 내년 2016년 6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나간 역사를 통해 저희의 은사와 사명을 살도록 초대해 주신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또한 저희와 함께 발자취를 더욱 생동감 있게 나누어주신 많은 은인분들께 감사드린다.
지나간 역사를 통해 하느님의 섭리에 감사하며 다가오는 미래에 더 깊이 사명에 투신할 수 있는 통찰력과 안목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서울에서 성심수녀원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이 수녀원을 거룩한 동정녀 마리아께 의탁하면서 ‘천상의 모후이신 마리아’를 주보 성인으로 정하였습니다. 복녀 필리핀 뒤셴께서 보시면 이 시작이 플로리센트와 세인트 찰스의 경험과 비슷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중반에 이토록 단순하고 토속적인 삶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마치 프란치스코회의 정신으로 가난한 여인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의 초대 주교이신 노기남 주교님께서 1955년 7월에 공식 초청을 하셨는데, 그것은 성심회 초창기 수녀들이 들으셨던 부르심과 같았습니다. 관구장이 미리 두 번을 방문하면서 파리외방 선교회 신부님들이 주신 집을 수녀원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1950년 한국전쟁 이전에 신학교로 쓰이던 건물의 일부입니다. 아주 가까이 신부님의 본부가 있었고, 그 사이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1925년 7월, 78명의 동료들과 함께 시복된 한국 첫 사제 복자 김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를 모셨는데, 그분은 1846년에 치명하신 분입니다.
1958년 8월부터 건물의 복구와 개조가 시작되었습니다. 10월 첫 금요일에 수녀들이 들어오셨는데, 처음에는 우선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기거하셨습니다.
10월 27일 첫 원장으로 매카디 플린트(McHardy Flint)수녀가 임명되었는데, 그분은 일을 돌보는 분들과의 언어 소통에 어려움은 있었으나 독창적인 방법으로 의사 소통을 잘 해내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교회 단체, 교회 당국, 막 진출한 예수회의 협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미 두 분의 귀중한 협조자를 채용하였는데, 그 중 한 분은 영어를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통역, 심부름 그리고 남자 선생님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시는 분들을 위해 운전해 주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봉쇄구역 밖에서 두 분의 보조 수녀들을 도울 수가 있었습니다.
첫 사도직은 개인 수업으로 시작되었는데,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성심회의 첫 교육 사업은 극동 지역의 관습대로 1957년 4월에 시작될 것입니다.
총원장 수녀님, 이렇게 멀리 있는 가족들을 강복하여 주십시오. 아마도 총원장 수녀님은 성심회의 벤자민 같이 우리를 어루만져지는 특혜를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수녀님과 아주 가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1956년
한국 성심공동체
박정자 수녀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전도 4, 1-2). 지극히 평범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해진 때에 따라 산다는 것이 자신의 일부가 뽑혀지는 힘겨운 줄다리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1974년 겨울, 국민학교 교장의 책임을 맡아 달라는 장상 수녀님의 제안을 받았다. 종신서원 직후 아직 서원의 열기가 불타고 있는 때였지만 쉽게 응답할 수 없는 무거움으로 다가왔다. 기도해 보라는 수녀님의 말씀이 죽기까지 순명하겠다고 공표한 나에겐 결정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면서도 흔쾌히 대답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아쉬움의 양면 감정을 느끼면서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975년 2학기에 한순희수녀님의 뒤를 이어 국민학교에 부임하게 되었다. 350여명의 학생들과 5명의 담임선생님, 서무과 직원 1명, 그리고 등사실 직원 등 모두 9명의 교직원이 당시 성심국민학교의 전 가족이었다. 그것도 1976년부터는 유일한 남자였던 서무과 직원마저 사임하게 되어 여자 일색의 학교가 되었다. 어쩌면 한국에서 뿐 아니라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현상이었을지 모른다.
학교장이 전교생의 일기 지도를 할 수 있는 학교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가 어찌나 청결하게 청소되어 있었던지 장학사가 신발을 벗어 들고 교장실까지 오게 되어 당혹감을 느낀 적도 있다. 때론 장난이 지나친 어린이가 교장실까지 인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교장 수녀님, 잘못했어요” 하며 빠질듯이 쳐다보는 맑고 까만 눈을 대하게 되면 야단은 커녕 그저 성큼 끌어안을 수 밖에 없었다. 하느님 사랑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할 것인가를 조금 실감나게 해 주었다.
그러나 학교도 엄연한 사회로서 의도적인 학업 뿐 아니라 다양한 만남을 통해 사회 생활을 배우며 인격체로서의 자신을 성숙시켜 가는 중요한 장으로 생각할 때, 성심의 작은 규모 그리고 여자 일색으로 제한된 분위기는 바람직한 교육 조건에 부족함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또한 일정한 계층만의 또래집단 같은 특수성이 형성되어 사회에서 약간 배타적인 인상을 주게 되는 점 역시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소수의 학생으로 운영해야 하는 재정적인 문제도 안고 있었다. 이에 성심수녀회가 교육의 문호를 사회에서 작은 이들을 포함한 일반 대중을 향하여 개방해야 한다는 방향전환의 시도가 더해졌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길을 찾으라는 모원의 권고가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새로운 결단을 내리도록 우리를 움직인 요인들이었다.
국민학교, 국제학교, 중학교의 폐교가 수많은 논의와 식별을 거쳐 결단에 이르게 되었다. 성심의 교육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방편으로 고등교육을 지속할 것이 선탣되었다. 가치관 형성의 중요한 시기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뜻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어려운 결단을 냐기게 하였다.
1976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우리의 결정이 학부모님께 공표되었다. 준비없이 이 소식에 접하게 된 학부모님들의 반응은 기름붓고 불지른 듯한 놀라움과 당황함이었다. 특별대책위원회가 급히 소집되었다. 당시 지구장이셨던 김재숙 수녀님과 함께 대책 위원들과의 모임을 갖던 때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단 한마디 ‘명년 봄에 신입생 모집 안함’이라는 말만이라도 취소헤 달라고 하였다. 일어섰다, 앉았다, 책상을 치며 큰소리를 쳤다, 달랬다 하던 당시의 모습은 이성이 제대로 작용할 수 없었던 감정의 폭로라 할 수 밖에 없었다. 분위기 자체로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여지도 있었지만 나의 마음을 건드리고 아프게 했던 것은 학부모님들을 통해서 느껴져 온 성심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신뢰와 사랑에 상처를 준 것이 송구스럽고 마음 찢어지는 듯한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경제적으로 어렵다 하셨지만 이런 최악의 경우가 되도록 미리 대처하지 못한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들의 잘못이요 불찰이니 재고해 주시면 최선의 노력을 하겠습니다.” 간곡한 부탁은 차라리 애원에 가까운 것이라고 느껴졌다. 수녀회에서 다시 논의해 보기로 합의함으로써 첫 모임을 끝냈다.
긴급 수녀회의를 소집하여 각 개인의 의견에 대한 재확인을 한 결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우리의 결정을 되물리 수 없다는 의견의 합의를 보았다. 재정보다는 성심회의 방향 등의 다른 요인들이 결정에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수녀회의 결과를 알라기 위하여 대책위원회 회장님을 만나야 했다.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수녀회의 결정을 전달해야 이해가 가능할 수 있을까,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등등의 긴장과 초조함에 약속시간까지의 이틀을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보냈다. 미리 너무도 걱정하고 고심한 탓인지 막상 시간이 되었을 때에는 오히려 담담하고 차분한 심정으로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다는 편안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더 이상 학교를 계속 할 수 없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드리며 재정은 여러 요인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씀드렸다. 조용히 설명을 들으신 회장님은 의외로 “수녀님, 수녀님들의 사정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집에 가면 팔에 매달려 ‘아빠, 어떤 일이 있어도 학교만은 문을 닫게 하지 말아 주셔요.” 라고 애걸하는 두 딸을 볼 때는 마음이 미어집니다.”하시며 고개를 떨구셨다. 성심에 대한 지극한 사랑, 이것이 우리들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었다. 성심을 아끼는 모든 분들께 못할 짓을 하는 듯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대의 요구가 분명하였다. 그러면서 이 소요 속에서 예수성심께서 함께 하고 계심도 체험할 수 있었던 은혜로운 시기였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가도록 만드셨다.(전도. 311)’ 라는 말씀이 지금에 와서는 보다 힘있는 말씀으로 다가온다.
여려운 때였지만 성심인 모두의 사랑을 재확인한 소중한 계기였으며, 성심의 진실하신 사랑이 드러난 은혜로운 때로서 감사드릴 수 있는 때라고도 생각된다. 참으로 제 때에 알맞게 맞아들어간 때라고 확신하게 되는 사건이었다고 하겠다.
지금은 사방에 흩어져 살지만 성심국민학교 동창들은 지금도 내 마음 안에 성심가족으로 늘 남아 있으며, 우리 모두가 성심의 사랑받는 딸들로서 계속 성숙되어 가리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이 글은 한국 진출 35주년 기념책자 ‘예수성심의 영광을 위하여’에 있습니다.
용산 신학교
조선땅에서 신학생 교육을 위해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북 제천에 자리잡은 성 요셉 신학교 즉 ‘배론신학당’이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 때 폐쇄 당하였고, 1885년 경기도 여주군 부엉골에 신학교가 다시 개교되었다. 한국교회는 1886년 한불수호조약 체결 후 파리외방전교회가 1886년 순교지로 이름난 한강 새남터 서북방에 위치한 용산 함벽정 일대의 땅을 매입하고, 1887년 3월 부엉골 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교명을 ‘예수성심신학교’로 개칭하였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첫 서양식 교사 건물은 코스트(E.Coste)신부의 설계와 감리로 1892년 6월 완공되어 소신학교 건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1960년 철거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구 용산 신학교 건물은 1911년 12월 완공되어 1942년 2월 16일까지 대신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외부가 조오지아풍으로 장식된 2층 붉은 벽돌 구조로 사적 제 52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1956년 10월부터 성심수녀회 수녀원으로 사용하여 현재 성심수녀회 관구 사무실과 성심기념관 및 역사 자료실로 사용하고 있다.
원효로 예수성심성당
신학교 성당으로 지어진 원효로 예수성심성당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다수 순교자들이 처형당한 새남터가 내려다보이며, 당고개 순교지가 건너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종현(명동)성당과 약현(중림동)성당을 설계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성당은 1899년 기공하여 1902년 완공되었다.
예수성심성당은 붉은색과 회색 벽돌로 쌓아올린 조적조 양식으로, 뽀족 아치로 된 창문이나 지붕 위의 작은 첨탑이 있어 전체적으로 역식화된 고딩풍의 외관을 갖추고 있다. 성당 내부는 제단과 예배석만 있는 단순한 성당 형식으로, 출입구 위쪽 2층에는 성가대석이 있다.
원래의 색유리창은 1950년 한국 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며 현재 있는 제대 북쪽 색유리창은 1984년-1985년 이남규 작가가 제작한 것이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를 당시 신학교 성당인 이 예수성심성당에 1901년에서 1960년까지 안치했었는, 1960년 신학교를 혜화동으로 이전하면서 옮겨졌다.
현재는 성심수녀회와 성심여중고 학생들의 전례와 기도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사적 제 521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성심수녀회 창립자 성녀 마들렌 소피 바라(Madeleine Sophie Barat)는 1779년 12월 12일 프랑스 브르고뉴 지방의 주앙니 마을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바라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소피는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교양을 지닌 어머니에게 정서적 영향을 받았으며, 마을의 중학교 교사였던 오빠에게서 엄격하고도 뛰어난 교육을 받았다. 소피는 소녀 시절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수 성심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였다. 16세 이후에는 파리에서 젊은 여성들과 함께 사제가 된 오빠에게 신앙교육과 인문교육을 받았으며 급변하는 사회 상황에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한 필요성을 파악하게 되었다.
소피는 1800년 11월 21일 파리에서 세 명의 동료와 함께 첫 서원을 하였는데, 이로써 성심 수녀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1801년에는 청소년 교육을 통해 예수 성심의 사랑을 알리고자 아미앵에 첫 성심학교를 열었다. 혁명기의 여파로 인한 혼란이 수녀회를 끊임없이 위협했으나 한결 같은 확신으로 교육철학을 확립하고 시대에 맞추어 교육방법을 새롭게 변혁시켜 나갔다. 소피는 1865년 5월 25일 파리에서 85세의 아름다운 삶을 마치고 하느님 품에 영원히 안기게 되었다. 이후 1908년 5월 24일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24일에 시성되었으며 현재 소피의 유해는 파리의 프란시스 하비에르 성당에 모셔져 있다.
프랑스 부르군디 지방 주와니는 성심수녀회의 중요한 장소이다. 그곳은 성심수녀회의 창립자 마들렌 소피이 바라가 1779년 12월 12일 태어났으며, 소피이는 예정보다 2개월 일찍 태어나 너무연약해서 다음날 아침 일찍 집 근처 생 티보(St Thibaux)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소피이의 아버지는 자크 바라(Jacques Barat)로 포도 경작인과 술통 제조자였다. 소피이는 주와니의 포도밭과 언덕, 욘(Yonne)강을 따라 자리 잡은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그녀가 태어났던 3, Rue Davier에 위치한 집은 현재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영성센터로 사용하고 있다.
소피 영성 센터는 전세계에서 오는 성심회 수녀 뿐만 아니라 동문, 협력자, 성심학교 교사 및 학생등이 와서 피정, 워크샵등 하게 된다.
성녀 마들렌 소피여,
오늘 저희가 이렇게 함께 모임에,
저희로 하여금 당신이 닦으신 오솔길을 따라 걷는
참된 후배가 되도록 도와주소서.
저희를 도우시어
공동소명에 맞갖게 응답하게 하시고
참으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저희를 이끄시어
그리스도인 생활의 근원에로 돌아가게 하시어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주님의 사업을 완수하게 하소서.
또한 성심의 깊은 사랑을 배워 실천하게 하소서.
그 사랑이 곧 인간 안에 계신 하느님 현존의 표지이옵니다.
저희를 화해에로 이끄시어
주님 안에서 받은 저희의 소명이 하나 되게 하소서.
저희의 공동체들이 사랑과 일치의 표지되게 하시며
개개인의 다양한 소중함을 받아들이고 살리는
사랑의 터전이 되게 도와주소서.
저희는 목적지를 알고 있는 나그네요
순례자임을 항상 기억케 하시어
여로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결코 낙오함 없이
동행들과 더불어 끝내 기쁨 중에 여행하게 하소서.
마침내 저희를 진지한 기도생활과
세상을 보는 관상적인 안목과
참된 인간관계에로 이끄심으로써
저희의 삶이 보람되고
저희의 일치가 진실 되게 하소서.
아멘.
자네트 어스킨 스튜어트(Janet Erskine Stuart, 1857-1914) 수녀는 1857년 11월 11일 영국 러트런드 지방, 코테스모어에 있는 성공회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성을 지닌 모든 피조물은 마지막 목적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오빠의 말을 듣고서, 자네트는 열세살의 나이에 진리를 찾기 위한 고독한 탐색을 시작했다. 최종 목적을 찾기 위한 탐색은 7년이 걸렸으며, 21세가 되었을 때 마침내 그녀를 가톨릭 교회로 인도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1882년 자네트는 런던 외곽, 로햄튼에 있는 성심수녀회에 입회하고, 거기서 30년간 수도생활을 하게 된다. 종신서원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련장직을 맡게 되었으며, 1894년 원장이 되었다. 17년 후, 1911년에 성심수녀회 제 6대 총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총원장 재임 기간 동안, 스튜어트 수녀는 수녀회의 모든 수녀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알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서 오스트레일리아와 일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성심수녀회의 모든 공동체를 방문했다.
자네트 스튜어트 수녀는 그녀의 저술을 통해 현 시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성심수녀회 수녀들뿐만 아니라 다른 수녀회의 수녀들, 그리고 영적 성장과 교육에 헌신하는 많은 개인들이 그분의 강의, 저서, 수필, 시를 통해 영감을 받고 있다. 저서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생명의 여인으로 키우기까지, The Education of Catholic Girls, 1912>가 있으며, <성심수녀회 The Society of the Sacred Heart, 1914>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여행하는 배 위에서 집필한 작은 책자이다. 사후에 출간된 글모음으로 <영성생활의 한길과 뒤안길, Highways and Byways of the Spiritual Life ,1923>과 <신앙 속의 기도, Prayer in Faith, 1936>가 있다.
스튜어트 수녀는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지 몇 달 후 1914년 10월 21일에 선종했다.
뛰어난 교육학자이자 총원장이셨던 자네트 스튜어트 수녀님은 성녀 마들렌 소피이의 교육정신을 자신의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려는 줄기찬 노력을 하시여 성심교육정신의 생생한 숨결을 발견하고 나아가 우리 시대에 알맞는 성심교육정신의 재해석과 그 새로운 적용이라는 도전을 하였다. 그래서 2014년, 스튜어트 수녀님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전세계 성심화원들은 수녀님의 정신을 기리며 수녀님을 통해 이 시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를 찾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 자넷 스튜어트
빛과 고움 찾는 한얼,
안식 그리는 영혼,
이해 받기 바라는 맘,
축복의 길 하나뿐.
온갖 기쁨, 아름다움,
세상 복락 스러지니,
뵈지 않는 영광만을
한결같이 관조하리.
넓고 넓은 창조세계
하염없이 헤매도
너의 갈망 채우실 분,
고향이신 하느님뿐.
듣고 보고, 느껴 맛봐
감추인 손길 바라며,
어둠이 가리어도
믿음 사랑 깨닫네.
만물 아끼시는 주님
우리 마음 아시니.
그늘진 땅 가로질러
영복으로 이끄소서.
– Janet Erskine Stuart, RSCJ
Spirit seeking light and beauty,jan2
Heart that longest for thy rest,
Soul that askest understanding,
Only thus can ye be blest.
All the joy and all the fairness
Fade away from earth’s delight
By the steadfast contemplation
Of the glory out of sight.
Through the vastness of creation
Though your restless thought may roam,
God is all that you can long for,
God is all His creature’s home.
Taste and see Him, feel and hear Him,
Hope and clasp His unseen hand;
Though the darkness seem to hide Him,
Faith and love can understand.
God, Who lovest all Thy creatures,
All our hearts are known to Thee,
Lead us through the land of shadows
To Thy blest eternity!
이 성화는 현재 로마의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에 높이 솟아 있는 트리니타 데이 몬티(Trinita-dei-Monti) 수녀원에 보관되어 있다. 본래 이 수도원은 15C 역대 프랑스 왕의 관대한 원조를 받아 작은형제회(은수회) 창설자이신 성 파올라의 프란치스코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그 후 1828년 교황 레오 12세의 의향에 따라서 성심수녀회에 기부되어, 트리니타 데이 몬티(Trinita-dei-Monti)는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빛내는 청소년 교육의 중심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버팀이 되는 마리아의 성소(聖所)가 되었다.
1844년 성심수녀회의 청원자였던 젊은 폴린 페르드로는 당시의 원장이셨던 꼬리오리 수녀에게 수녀원을 향하는 2층 복도의 벽에 성모님을 그리고 싶다고 청하였다. 폴린은 프레스코의 특수 기술도 모르면서 온 힘을 다하여 일을 시작하였다. 경험이 없던 이 젊은이가 성모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동안 벽면이 13시간 동안이나 마르지 않았다고 전해져 내려오는데, 폴린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성모의 보호를 게을리 하지 않고 구한 바에 대한 특별한 도움을 나타내는 ’작은 기적’이었다고 여겼다.
그 해 7월 1일 그림은 일단 끝났으나, 프레스코의 색채가 예상보다 너무 선명하여 커튼 뒤에 숨겨 두어야만 했다. 그 결과 프레스코는 서로 작용하여 현재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이 그림은 1846년 10월 20일까지 「백합의 성모」로 불리며 사랑을 받았었다. 1846년 10월 20일, 교황 비오 9세께서 수녀원을 방문하시어 이 그림을 보시고 “이 분이야말로 「가장 경탄하올 어머니」이다.” 라고 칭찬하신 이래로 이 그림은 「경탄하올 어머니」라고 불리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부터는 이 성모님의 전구로 많은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다. 말을 못하던 성모성심회의 부랑뺑 신부는 이 성모님께 9일 기도를 바친 후에 잃어 버렸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후, 교황 비오 9세는 이 성화 앞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고 다음 해 10월 20일은 「경탄하올 어머니」의 축일로 제정해 주셨다. 그 후 많은 순례자들이 이 성화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성심수녀회의 창립자인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와 성 요한 보스코, 성녀 소화 데레사, 성 비오 10세, 복자 빨로띠 같은 분들이 대표적인 순례자들이시다.
-성심학교 학생들의 기도-
백합같이 순결하신 어머니,
어머니의 소박하고 온유한 마음의 빛이
저희 마음의 어두운 구석을 밝혀 주시어
어른이 되어 가는 길에서 겪는
아픔과 걱정을 통해 성장하게 빌어주소서.
깊이 생각에 잠기신 어머니, khs2
바쁘고 어지러운 일상생활에
마음이 어지러울 때
어머니처럼 침묵할 줄 아는 지혜를 배워
진리와 정의를 분별하는 젊은이 되게 빌어주소서.
꾸준히 일하시는 어머니,
이웃과 세상을 위해 좋은 일에
재빠르고 부지런히 일하게 하시고
드높은 이상을 품고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경탄하올 성심인의 어머니,
저희는 모두가 하나같이 소중하고
사랑스런 존재임을 늘 기억하게 빌어주소서.
아멘.
현재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성심학교에는 「경탄하올 어머니」의 성화가 모셔져 있다. 그 이유는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께서 이 성화의 젊은 성모님의 모습에서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화 「경탄하올 어머니」가 몸으로 나타내는 큰 은혜는 내적 생활을 사랑하는 마음일 것이다. 손을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놓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조용히 생각하는 모습 전체가 이를 말해 준다. 마리아 곁에 있으면 주위의 번잡함도 없어지고 우리의 마음은 조용히 하느님 안에 쉴 수 있게 된다.
내적 생활과 함께 「경탄하올 어머니」가 가르치는 또 하나의 은혜는 마리아 옆에 세워 놓은 실꽂과 발치에 놓인 바구니가 상징하는 일이다. 그 바구니 위에는 읽고 있던 성서가 놓여 있다. 즉, 마리아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학문과 일도 동시에 사랑했다. 기도하고 생각하고 일한다는 기본적 태도를 성모님에게서 배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꽃과 정의의 태양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는 샛별을 볼 수 있다.
마치 한 여인이 조용히 걸어 나와
방안의 논쟁과 허튼 소리를 뒤로하고
부엌에 앉아 그녀의 무릎 위에 끌어당긴
털실 꾸러미, 옥양목과 벨벳 조각들을
등잔불 아래 무지개 빛 작은 덮개가 깔린
잘 닦인 식탁 위에 무심히 옮겨놓고…
이런 모습은 영원함과 무관하다
위대함을 얻으려는 투쟁이나 휼륭한 업적도 아니며
오직 마음속 깊은 명상으로
그녀의 몸과 하나 된, 조용히 밀어 올리는 숙련된 손가락
명백한 것들을 거슬러 어렴풋한 것들을, 거칠음을 거슬러 부드러움을
지배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이
다만 보살피는 마음으로…
-아드리엔 리슈 Adrienne Rich-
필리핀 뒤셴은 1769년 8월 29일에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태어났다.
20세 되던 해에 ‘방문회’라고 하는 수녀회에 입회를 하였으나,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이 수도공동체는 해체되었다. 그러던 중에 1801년에 필리핀 뒤셴은 ‘생트 마리 당 오(Saint Marie d’en Haut)’수도원을 얻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에 바로 이곳에서 우정과 사랑을 나눌 벗, 바라 수녀와의 만남을 계기로 하여 필리핀 뒤셴은 성심회 수녀가 되었다. 필리핀은 입회 이후 기도 중에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던 선교로의 부르심을 들었으나, 총원장이었던 바라수녀는 그를 격려하면서도 기다리게 했다.
1818년, 미국의 루이지애나의 뒤브르 주교가 성심회 수녀의 파견을 요청함에 따라 필리핀의 꿈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필리핀 뒤셴을 선두로 하여, 5명의 수녀가 고된 여행을 마치고 뉴올리언즈에서 배를 내렸다. 미국에서의 첫 공동체의 시작은 무척 힘들었다. 세인트 찰스에서, 플로리쌍에서 이 작은 공동체는 배고픔과 추위, 혹독한 날씨 그리고 고된 노동, 전염병 등으로 많이 고생하였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을 받아서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젊은이들은 성심회에 입회하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필리핀 뒤셴과 그 동료 수녀들의 삶에서 풍기는 기쁨과 아낌없는 투신의 모습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뒤셴 수녀는 틀에 박히지 않은 자기 헌신과 활력을 보여 주었다. 집 안이나 정원에서 가장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밤에는 공동체와 기숙사의 일들을 정리했다. 아주 엄격하게 모든 것을 절제했다. 학식이 깊고 총명한 여성이었음에도 영어를 말하는데는 아주 큰 어려움을 겪었다.
1841년 6월 말에야 ‘포타와토미’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오랫동안 그의 마음 안에 간직해 왔던 바 즉 원주민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하였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연로해져서 슈가 크릭(Sugar Creek)에서 1년 밖에 머물지 못하였다. 작은 성당에서 늘 오랫동안 기도하곤 하던 필리핀 뒤셴 수녀를 인디언들은 ‘늘 기도하는 여인’이라고 불렀다.
1852년 11월 18일 미국의 세인트 찰스(Saint Charles)에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로즈 필리핀 뒤셴은 세인트 루이스 제퍼슨 기념관 현판에, 그 이름이 “지워져서 안될(must not wither)” 개척자 여성들 중 한분으로 기념되어 있으며, 또한 미조리주 세인트 찰스에 그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1940년에 시복 되었고, 1988년 7월 3일에 시성되었다.
고통과 오해 앞에서도 용기 가득하셨던 개척자시여,
저희에게 굳건함을 허락하소서.
우정에 있어서 겸손하고 뜨거우며 사심이 없으셨던 분이시여,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그리스도 왕국을 위한 투쟁에 지치지 않으셨던 분이시여,
저희에게 당신의 열정을 주소서.
살아 계신 기도의 교훈이시여,
강생의 영성과 파스카 신비를 살게 저희를 도와주소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도록 선교사들의 마음을 북돋우시는 분이시여,
하느님 나라를 위한 당신의 열정을 허락하소서.
하느님의 때를 인내롭게 기다리신 분이시여,
저희에게 희망을 가르쳐 주소서.
인디언들을 위한 투신에 항구하셨던 분이시여,
저희 마음을 형제자매들에게 열어 주소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를 조배하는데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분이시여,
저희에게도 당신처럼 제대 위의 성체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주소서.
새로운 세계로 향하셨던 개척자시여,
가난한 이를 참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소서.
가난과 전적인 헌신의 모범이신 분이시여,
저희도 자신을 잊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소서.
성녀 필리핀 뒤셴이여,
아낌없이 당신의 삶을 바치셨던 예수 성심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Maria Cacilia Amaranta, RSCJ (성심수녀회 브라질 관구)
성 로즈 필리핀 뒤셴(Rose Philippine Duchesne)이 누구인지,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지만, 1840년에 한국의 교회와 신자들이 모진 박해하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한국을 지망했다는 말을 듣고 친근감과 동시에 그분의 전 교회에 대한 사랑과 인류 복음화에 대한 열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제 저녁, 필리핀 뒤셴 성녀의 생애를 소개하는 짧은 글을 읽었습니다.
본시 타고난 성품은 의지가 강하고 불 같은 정열을 지녔으며, 초지 일관하는 기질을 가지고 계신 분이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로서 첫 수도회인 성모 방문 수녀회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1789년에 프랑스 혁명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박해를 받고 수녀원이 해산되는 폭풍우가 몰아쳤을 때, 필리핀 성녀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11년 동안 자신도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으면서도 감옥에 갇혀 있는 신부, 숨어 있는 신부, 병자, 가난한 이들, 또 학교와 고아원이 해산되어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구해 주고, 위로와 격려, 사랑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성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과 좌절을 수없이 맛보았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성녀의 생활은 그 후, 성심 수녀회의 마들렌 소피 수녀를 알게 되어 성심회에 입회하고 성심회 수녀가 되어 살다가 1818년, 자원하여 미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난한 개척자들 속에서 교육과 함께 자선 사업, 인디언 원주민들에 대한 복음 선교 등에 헌신했습니다.
이분은 기가 막힐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는데, 계단 밑의 작은 장을 자기 방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오랜 시간을 들여 기도하고, 때로는 밤새워 기도하였다 합니다. 인디언들이 밤새며 기도하는 성녀의 치맛자락에 몰래 종이조각들을 올려놓았다가 그것이 아침이 되어도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언제나 기도하는 여인’이라는 칭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성심회는 발전하여 미국 전역과 캐나다, 멕시코 그리고 멀리 뉴질랜드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그런데도 필리핀 성녀는 이것을 당신의 공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공을 남에게 돌렸으며, 자신은 거듭해서 실패한 사람이라고 했다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분의 겸손, 용기, 극기, 정열, 헌신적 봉사, 기도, 모든 것이 비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그 짧은 전기를 보면 필리핀은 심한 고독감을 체험해야 했고, 끊임없는 실패감에 부딪히며 살았다고 합니다.
왜 그녀는 그렇게 심한 고독감에 사로잡혀야 했는가? 왜 실패감에 부딪히며 살아야 했는가?
신앙인으로서 수도자로서 심한 고독감에 사로잡혀야 했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이었는가? 즉,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해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데서, 또는 반대나 오해를 받는 데서 느끼는 고독감이었는가?
열심히 헌신적으로 봉사했건만 결과는 아무런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난데서, 아니면 많은 성인들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영혼의 밤에서 오는 고독감이었는가? 또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홀로 사막을 걷는 것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 신의 부재(不在)가 주는 고독감이었는가?
저는 성녀에게 있어서 고독은 이같이 인간적인 것이면서 더 깊이는 신앙적인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특징은 Fortitude, 곧 용기 또는 불굴의 정신이었고, 이것은 동시에 신앙에서 오는 것이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녕, 참된 신앙은 하느님이 계심에서 시작되지만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고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은 그 고독, 그 실패감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은 고독 속에서도 하느님을 굳게 믿는 것, 그분에게 여전히 전적인 신뢰를 두는 것,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항시 주인은 주님이심을 인정할 때 그것이 참 신앙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구약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욥의 경우가 아주 전형적인 경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욥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친구나 아내까지 등지고 이해하지 못했을 때, 그 고독감과 실패감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 46)라고 소리치신 그 죽음의 어둠 속에서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녀 필리핀은 바로 이 예수님의 뒤를 그대로 따른 분 같습니다. 그래서 그 짧은 전기에서 말하기를 “이 모든 어려움들은 그녀를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이끌었고, 그녀의 하느님에 대한 열절한 신뢰감은 흔들릴 줄 몰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갈 때, 이미 그녀를 잘 아는 바랭 신부는 “그녀의 오래된 열성의 불은 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화되고 올바른 방향을 잡아, 자기를 포기한 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길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포기한 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기다···. 이것은 어떤 처지에서도 자기를 찾지 않고 하느님께 자기를 통째로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고 괴로울 때나, 그 밖에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하느님은 나와 함께 계사고 나를 사랑하시며 나의 모든 것 되심을 의심치 않으며, 그분이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분이 주인이심을, 나는 그분에게 속한 종에 불과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신앙이요, 이것이 곧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그렇게 비울 때, 하느님으로 가득 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