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희 그라시아 수녀님

김숙희 그라시아 수녀님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나의 영웅심을 부추기신 하느님 

4대 종교가 공존하는 우리집안

내가 몸담고 있는 수도 공동체 수녀님들 가정이 대부분 구교 신자 가정인 것과 달리 나는 한 집안에 4대 종교가 공존하는 배경에서 자라났다. 불자이신 부모님, 천도교 신자이셨던 할머니, 개신교 신자인 동생과 함께 집안에서 나는 가족 중 유일한 가톨릭 신자이다. 이런 배경을 가진 내가 어떻게 수도 생활로 부르심을 받아 이 길을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강한 팔로 나를 오늘, 여기까지 이끌어 오신 ‘그분’에 대해 경외심이 절로 생긴다.
나는 1981년 9월 성심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입회하여 “나의 성소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하고 되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나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하나와 가족들, 그리고 내 성격과 마음 속 깊은 곳의 갈망을 통하여 이 길로 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의 부모님 고향은 경남 남해도이다. 집안에 아들이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집안에, 딸만 일곱을 둔 부모 사이에서 나는 둘째 딸로 태어났다. 독자이며 종손인 아버지에게서 아들이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던 할머니 할아버지께, 나의 부모님은 아이가 태어나도 그 소식을 기쁘고 당당하게 전하지 못하고 ‘이번에도 딸입니다’라는 송구스러운 말씀으로 대신해야 했다. 그 당시 한국 여성으로서는 상당히 총명하고 능력이 많으셨던 나의 어머니도 마치 죄인처럼 새로 태어난 아이를 안고 매번 눈물을 흘리셨다. 거의 일생을 임신하고 출산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사신 어머니를 보며 나는 어려서부터 결혼은 안 할 것이며 대신 독신으로 낙도에 가서 가르치거나, 인류에 봉사하는 삶을 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과 불합리함을 잘 아시는 어머니께서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청을 할 때마다 “그래, 해 보렴” 하시며 파격적인 일들을 허락해 주셨고 수도 생활까지도 허락해 주셨다.

하느님과 친하게 만든 담임선생님

짓궂으신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패턴은 나의 영웅심을 살짝 부추기는 것이었다. 나는 천주교 고등학교인 계성여고로 배정을 받았는데 뜻밖에도 담임선생님께서는 영어를 가르치는 수녀님이셨다. 반장을 뽑는 날, 내 눈에 멋지게 보이는 담임선생님 (샬트르 바오로회의 박정자 레미지오 수녀님)께서는 그냥 관례적으로 투표를 하게 하지 않고, “여러분 중에 누가 반장으로 봉사를 해주겠어요? 누가 하라고 해서 하거나 하지 말라고 해서 못하면 자유가 없지요”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자유! 이 말이 나의 영웅심을 건드렸다. 우리 중에 적어도 하나는 자유로운(?) 사람이 나와서 우리 반의 체면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얼른 손을 들었고, 반장이 되었다. 이런 패턴은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여러 번 반복되었다. 나는 수녀님을 몹시 사랑하게 되었고, 잘 모르지만 하느님과도 친하고 싶었다. 그해 학교에서 교리를 받고 영세를 했는데 담임선생님인 수녀님은 그라씨아 (은총)라는 예쁜 세례명을 선물로 주셨고, 멋진 대모님도 소개해 주셨다. 대모님은 대학교를 마치자마자 성심 수녀회로 입회를 하셨다. 대모 대녀라는 인연 때문에 나도 성심회 수녀가 된 것이다. 아직 영세도 안 했을 때인데도, 인생에 관해 너무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 둘째 딸에 대해 뭔가 걱정이 되셨는지 어머니는 수녀님께 자주 상담을 하셨다고 한다. “숙희가 저러다가 수녀님이 되면 어떻게 하지요?”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여고생들이 사춘기 감정으로 한때 그런 생각들을 한답니다.” 그 말을 믿고 안심하신 어머니는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영세를 받은 후, “칠층산”, “기도의 체험” “러시아에서 그분을” 등등 담임선생님께 소개 받은 많은 영성 서적을 열심히 탐독하였고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 영적인 삶에 대한 갈망과 하느님께 일생을 봉헌하고 싶은 열망이 나를 가득 채웠다.

내 삶을 바꾼 막내 동생의 출생

고 3 때였다. 한 해 선배인 언니가 미아리에 있는 스승 예수 제자 수녀회로 입회를 했다. 나는 새벽반 학원을 다니던 중이었는데, 수요일과 일요일에는 학원에 가는 대신 미아리 수녀원으로 가서 아침 기도를 같이 바쳤다. 노래로 하는 수녀님들의 아침 기도는 천상의 소리 같았고, 고 3의 절박한 심정과 섞여서 “하느님, 대학에만 붙게 해 주신다면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나이다.” 라고 하느님과 은밀한 거래를 하였다. 한때는 그곳 수녀원으로 부르시는가 생각하여서 반 봉쇄 수녀회인 그 수녀원 안에서 발목까지 오는 수도복을 입고 일생 하느님의 시선에 나를 숨기고 기도와 찬미의 삶을 사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들어가 넓은 세상(?) 맛을 보니 그곳은 도저히 나의 왈가닥 성격과는 맞지 않을 것 같아 그 수녀회로 입회하려던 생각을 슬그머니 철회하게 되었다. 남녀공학에 들어가 남학생 친구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가까운 감정도 느끼는 가운데 하느님과의 약속은 점차 내 머릿속에서 잊히고 있었다.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낸 때는 유신 독재 말기라 나는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에 꽤 주도적으로 참가하였고, 시대와 세상을 비판하며 절망으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대학교 1학년 때 내 삶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어머니께서 아들 손자를 바라는 시부모님의 뜻에 거역하지 못하여 마흔 다섯의 나이로 일곱 번째 아이를 임신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늦은 나이에 임신을 감행하신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실망이, 그리고 개인을 희생하게 만드는 세상의 관습에 대한 저항과 절망으로 나는 몹시 우울했고 자주 울고 다녔다. 세상에 대한 미움과 화는 폭발 직전의 화산과 같았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막상 동생이 태어나자 식구들 모두가 그만 홀딱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이다. 십년 만에 새로 본 동생은 우리와 손가락도 닮았고 발가락도 닮았고, 코도 눈도 다 닮았다. 어찌나 예쁘고 신기한지 나의 딱딱한 마음을 일순간에 바꿔 놓으신 하느님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와 찬미가 흘러 나왔다. 세상이 아무리 불합리해도 하느님께서는 곡선으로도 직선을 그릴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었고 이렇게 하느님께 승복하는 체험은 다시금 나의 삶을 봉헌하고 싶다는 갈망을 불러 일으켰다. 그 뒤의 신앙생활은 참으로 큰 기쁨을 주었고, 피정 때마다 하느님의 현존 체험을 강하게 하였고 그분과 한평생을 함께 하는 삶에 대한 열망을 더 깊이 갖도록 하였다.

입회와 어머니의 편지

대학교 4 학년 때였다. 아무래도 딸이 수상한지 어느 날 어머니는 졸업하고 인생을 어떻게 살 거냐고 물으셨다. 나는 솔직하게 수도자의 길을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걱정했던 일이 현실이 되나 보다 생각하셨는지 한숨을 쉬시며 어머니는 나도 알고 있고 어머니도 아시는 성암 스님이라는, 근처 절의 학생 지도 법사를 찾아뵙고 의견을 들어 보자고 제안하셨다. 미리 잘 말씀해 달라고 전화까지 했는데, 스님께서는 어머니와 나를 놓고, “수도 생활을 적어도 20년 이상 해 본 사람을 스무 명 넘게 만나서 수도 생활에 대해 들어 보고 결정을 해라.” 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스님의 대답에 다소 실망을 하였지만, 그만큼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는 말씀이시려니 하고 적당히 해석을 하고는, 실상은 한 사람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수녀원에 입회를 하였다. 입회 후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내게 보내오셨는데, 지금도 그 편지를 가끔 읽어보며 분발심을 가진다.
“ (중략)……. 비록 가는 길은 서로 다르지만 한 종교인으로 완숙된 네가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니, 너나 나나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경주자가 아니겠니? 부지런히 정진하여 뜻을 이루도록 하여라.”

입회는 내 생의 가장 큰 은총

1981년 9월 8일 성심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이것은 지금도 내 삶의 가장 큰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어려움이 길에 깔려 있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까지 수도 생활을 행복하게 한 것 같다. “한 영혼을 위해서라도 이 세상 끝까지 가기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하셨던 창립자 마들렌 소피이의 정신이 배어 있어서인지, 주보인 예수 마음을 배우며 살려고 노력해서인지, 선배 수녀님들은 철저한 것 같으면서도 나를 통 크게 믿어 주고 인격적으로 대해 주는 부분이 있었다. 수도 생활 초심자였을 때, 나는 젊음의 치기와 이상으로 선배 수녀님들을 비판하였고 건방진 얘기들을 많이 했다. 그때마다 선배 수녀님들은 꽤 너그럽게 받아 주고 기다려 주셨다. 단체로서, 개인으로서 약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복음대로 살려고 하며 세상의 변혁을 위해 열성적으로 투신하는 모습을 그분들에게서 본다.
수도 생활 역시 일생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통합의 길을 간다는 점에서, 일반 사람들이 겪는 인생 역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성장 과정을 거친다. 수녀회에 들어와서 몇 달 동안은 그야말로 하늘을 붕붕 떠다니는 것처럼 기뻤다. 수도 생활에서 신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청정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는 것 같아 ‘내가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련다.’ 하고 여러 번 고백하곤 했다. 수도 생활을 한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 변기에 손을 넣고 속까지 닦아도 냄새가 하나도 안 났다. 또 주님을 위해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괜히 뿌듯했고 주님 생각에 애틋한 감정이 자주 벅차올랐다.

삶의 재료가 된 수도 생활의 갈등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차츰 수녀원의 삶이 어렵게 느껴졌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생각과 나의 고집스러운 부분 때문에 수련장 수녀님은 물론 동료 수녀들과도 자주 부딪쳤다. 또 성격과 성장 배경이 각기 다르다 보니 인간관계상 힘든 부분도 있었다. 같이 사는 수녀님의 일거수일투족이 괜히 눈에 걸리고, 부정적인 것을 꼬집어 내는 상대방의 태도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부모의 보호 아래 좁은 세상에서 편하게만 살아온 나는 인간의 부조리와 삶의 그늘진 부분에 대한 이해가 적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하기보다 “수녀원에 온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사랑이 부족한가?” 하며 곧잘 주위의 수녀님들을 비판하였다. 그런 갈등을 겉으로는 숨기며 살았는데 어느 날 몸에 종기가 몇 군데 나더니 점점 커져서 움직일 때마다 몹시 괴로웠다. 결국은 병원에 가서 종기를 째고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가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나는 커다란 체험을 하게 되었다. 내 안에서 째내야 할 부분은,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교만에 찬 자세라는 것이었다. 이 일은 내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는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크고 작은 갈등은 지난 26년간 계속된 내 삶의 재료였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나와 다른 이의 허물과 한계를 알면 알수록 이런 나를, 이런 우리를 받아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크신지 더 절실하게 깨달아 간다는 것이다. 삶이 버거워 수도 생활에 회의를 느꼈을 때, 나는 마음의 보따리를 여러 번 쌌다. 그런데 그때마다 하느님께서는 겉껍질을 벗고 참된 나로 성장하는 기쁨을 깨닫게 해주셨다. 그 맛에 다시 보따리를 풀곤 하였다. 생각해 보면, 그 시간들을 통해 주님은 나를 용광로의 불로 단련시키며 당신만이 나의 구원자임을 더 깊이 고백하도록 이끌어 주셨다. 나와 이웃의 죄와 약함이 얼마나 집요한지 보게 되지만 이런 나를, 이런 우리를 품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는 또 얼마나 헤아릴 길 없는지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인간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신비’

성심여고에서 영어 교사로 신명나게 15년여를 가르치고 난 어느 날, 총원장 수녀님으로부터 관구장으로 봉사하지 않겠느냐는 초대를 받았다. 그때 나는 한국 나이로 마흔다섯이었다. 처음엔 내가 관구장을 하기에 너무 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절할 이유를 찾다가, 마흔다섯이라는 나이는 어머니가 일곱 번째 아이를 출산한 나이였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나이만 생각하다 보니, 지금이 다른 수녀님들을 돌보아 드리는 일을 해야 하는 나이인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총원장 수녀님이 그런 제안을 하신 것도 나 개인의 장점만 본 것이 아니라, 한국 성심 수녀회 수녀님들의 성숙함과 준비된 여건을 믿으셨기 때문일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나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을 통해서도 일하신다는 마음으로 수락하게 되었다. 다시금 하느님은 나의 영웅심을 살짝 꼬드기며 일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로 관구장 소임을 시작한 지 6년째가 된다. 이 기간 동안 수녀님들에게 도움이 되는 봉사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개인적인 은총을 참 많이 받았다. 그 중에서 나의 부족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것을 가장 큰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또 수녀님들과 만나는 이들을 통해,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오묘하고 섬세하게 창조된 걸작인데, 자칫 부서지기 쉬우므로 귀하게 다루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배웠다. 이 소임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아픔, 희망과 이상을 더 깊이 알게 되었는데, 인간 문제는 사실 문제가 아니라 ‘신비’임을 자주 고백하게 된다.

이젠 중년의 사랑법으로

요즘은 피정을 해도 옛날처럼 애틋한 신혼 감정으로 하느님께 사랑을 고백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년을 보내는 내 또래 친구들이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듯이, 나도 수도회의 책임자로서 수녀님들을 돌보는 역할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중년의 사랑법 같은데 주님께서 과연 나의 이 애정 표현을 좋아하실지 모르겠다. 그래서 자주 여쭙곤 한다. 친구들이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다 완숙한 인간으로 성숙해 가듯, 나는 수도 공동체 안에서 기도 생활과 공동체, 사도직 생활을 하며 온전한 인간으로 통합되어 가는 여정을 걷고 있다. 어느 날,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보면 말이다. 꼭 절벽에 심어진 소나무 같다는 느낌이 든다. 비가 오면 꼼짝없이 비를 맞아야 하고 눈이 오면 꼼짝없이 눈을 맞아야 하지만, 해가 나면 그 대신 반갑게 해를 다 맞을 수 있단다.” 인생의 온갖 풍상을 무던히 견뎌 낸 어머니 같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이리라. 어머니의 이 말씀은 수도자로서의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비가 오면 수도자라는 우비로 몸을 가리고, 눈이 오거나 우박이 내리면 수도회라는 우산 아래로 숨어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해가 나도 그 햇살을 온몸으로 받지 못하고 그 따사로움과 고마움마저 양산을 받친 채 시큰둥하게 느끼는 것은 아닐런지…. 그런 생각을 하면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 비유를 거울삼아, 종종 내가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뎌져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비추어 본다. 앞으로의 여정이 어떨지 모르지만, 구름 기둥 안에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기에 그냥 보이지 않는 구름 기둥을 껴안으며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