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행복하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지요? 그 어느 날, 저에게도 어색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행복해지고 싶어 하긴 하지만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그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달렸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어서는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더 유명해질까?’에 혈안이 되어 쉬는 것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관심 없이 그리고 하느님은 내 성공을 위한 협력자라고만 생각하며 그저 달리기만 했습니다.
어느 날 그저 달리기만 하는 저를 안타깝게 본 한 친구의 “너 행복하니?"라는 질문이 저를 멈추게 했습니다. 그저 성공만 한다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제게 지금 행복하냐는 질문은 절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생각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였죠. 어느 학교를 졸업한, 어디에서 일하고 있는, 얼마를 버는, 어떤 자격증을 가진 누구누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알고 있는가? 이 또한 저에겐 혼란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돈, 명예, 끊임없이 바뀌는 세상 안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볼 여유는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건강을 잃었고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나를 꾸미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잃고서 정말 있는 그대로의 제 자신을 만났습니다.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하여 도저히 쳐다볼 수도 없는 제 자신을 살리시는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나 자신 조차도 받아들이기 힘든 나를 끌어안아주시는 하느님을 경험했습니다. 근육이 다 굳고 온 몸이 염증으로 뒤덮인 이상한 병에 걸려 걷지도 못하고 그저 누워서 숨만 쉬고 있었을 때 저는 제가 알지 못하는 저의 모습을 만났습니다. 저의 거짓상이 깨어지는 순간이었죠.
모든 것을 잃었다는 분노에 주변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것은 기본이었고, 제가 평생을 이뤄온 학벌과 경력, 그리고 지금 누리고 있는 명예와 더 달려야 할 목표 등이 저를 나타내는 전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모두 잃은 상황에서 느껴지는 열등감과 실패감은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울고, 화내고, 성질을 부리는 매일 매일을 지냈지만 그런 저의 모습에 지치지 않고 찾아와 말동무를 해주고 휠체어를 밀어 산책을 시키고, 화장실에 데려가는 친구들과 가족의 모습에 조금씩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살려달라는 기도조차 할 수 없었던 제 옆에서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어머니와 괜찮다고 말해주며 진심으로 그리고 온 몸으로 저와 함께 했던 친구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것없어서 나 자신 조차도 포기해버린 이지현을 끌어안아주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는 알몸으로 숨어있는 저에게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내가 나를 포기할 지라도 끝까지 붙잡으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벌레 같고 쓰레기 같다고 느끼는 제 자신을 소중히 다뤄주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 경험을 하고서는… 예전처럼 살 수 없었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에서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성소라는 것은 기도 중에 소리가 들리거나, 어느 날 뭐가 보이거나, 정말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사람들이 가지고 태어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주일미사만 겨우 나가고, 하느님을 나의 성공의 조력자라고 생각하던 제가 수도원에 입회하게 된 여정을 보면 성소라는 것은 특별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마음이 움직이고 그리고 어느 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도성소가 있는 것처럼 결혼성소가 있고 또 다른 일들에도 성소가 있는 것 처럼요…
만약 병을 통해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꼬리표를 뗀 제자신이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면 예전의 생활과 인생 목표를 쉽게 내려놓진 못했을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죽을 수도 있다는 극한의 상황, 만약 병이 호전 되더라도 이때까지 평생을 하나만 보고 달려왔던 피아노를 다시는 칠 수 없을 것이란 선고, 근육이 움직이지 않아서 침대에 누워 숨만 쉬고 있었던 일주일 동안의 경험이 저를 모든 것에서부터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저처럼 엄청나게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사건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브레이크의 시간은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이런 큰 일이 있기 전에 전조가 되는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분명한 징조가 있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잠시 의문을 가졌다가 다시 현재의 레일로 돌아가 미친 듯이 뛰기 마련입니다. 잠시나마 든 의문은 불편함을 가져오고 그 불편함은 자꾸 나를 돌아보고 원천을 찾게 만듭니다. 그것은 고통을 부르지요. 하지만 우리 중에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재촉하여 자신이 뛰던 레일 위로 올라갑니다. 쳇바퀴가 힘들지만 익숙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예전의 생활과 인생의 목표를 아주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단지 나에게 브레이크의 시간이 왔을 때, 뭔가 불편한 그 질문이 다가왔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거기에 응답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그리고 고통스럽고 불안하더라도, 시간낭비처럼 느껴지더라도 멈춰 서서 돌아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는 아는 지인을 통해 성심회 수녀님을 알게 되었고 성소모임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다른 수녀회 두 곳을 방문해 보긴 했지만 아직 병색이 완연한 (그땐 제가 머리도 다 나질 않고 몸도 엉망인 상황이었습니다.) 제 모습을 반겨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저에게 성심회는 또 한 번 있는 그대로의 저를 받아주는 곳이었습니다. 아직 몸과 마음에 큰 상처가 남아 있는 저를 있는 그대로 봐주셨고 있는 그대로 끌어안아 입회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저는 성심회에서 지원기를 성소모임을 통해 지내고 청원기 1년, 수련기 2년을 지낸 뒤 2013년 8월, 첫서원을 했습니다.
저희는 청원기와 수련기 때 성심회의 사도직을 돌면서 실습을 하게 됩니다. 수련기 2년차에는 부천에 있는 모퉁이 쉼터라는 가출청소년들을 위한 쉼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던 일들과 아이들을 만나면서 또 다른 모습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쉼터에서 실습을 하면서 한 가출청소년을 만났는데, 14살이었던 그 친구는 저에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질문했습니다.“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죠?”저는 순간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속에서 1초의 망설임 없이“돈”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거든요.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제게 그 아이는 당당히 말했습니다.“수녀님은 수녀님이니까 사랑이라고 대답하시겠죠?” 어쩌면 진부할 수 있는 저 말이 저에겐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제 맘속에선 또 1초의 망설임 없이 “아니…”라는 대답이 흘러나왔거든요. 그 실습 이후 저에겐 큰 질문이 두 개 생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 그리고 난 정말 그것을 사랑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수녀원에 들어오면 공동체 생활을 합니다. 사실 전 그것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모르는 사람들과 한 집에서.. 괜찮을까? 이제 5년째 공동체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큰 힘을 받습니다. 수녀님들의 작은 배려와 하느님을 향한 마음과 사랑으로 단합하여 뭔가를 해내는 여러 가지 일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또 다른 방식으로 체험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저도 모르는 사이 저에게는 삶의 큰 원동력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공동체 식구들에게서, 하느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마중물 삼아 제 안의 사랑의 우물을 가득 채우고 지금은 성심여자고등학교에서 교목실 수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쉼터의 14살 아이의 질문에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했던 제가 여러 자리에서 청소년들의 삶의 여정에 동반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다른 마음자리의 저를 만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네 돈도 맞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제가 버리고 싶었던 기억들과 아픔들, 모퉁이의 버려진 돌처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디딤돌이 되어 아이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상처가 맞닿는 곳에서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제가 수녀라서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안에서 사랑에 대한 진리를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전과 달라진 상황은 없습니다. 저는 아직 병이 있습니다. 조금만 무리해도 관절이 아프지요, 예전에 할 줄 모르던 것은 여전히 잘 모릅니다. 급한 성격과 다혈질의 성향으로 종종 일을 그르치는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완벽주의 성향이라서 새로운 것을 할 때나 계획에 없는 일을 할 때 힘들어 하며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죠. 하지만 크게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저를 휩싸고 있던 기본 감정인 불안함과 우울함이 없어진 것입니다. 수련기 활동을 거치면서 이것이 하느님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안정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아듣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무서운 훈육과 철저한 규칙과 통제 그리고 절제 생활을 통해 제가 뭔가를 알아들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저를 변하게 한 것은 그저 진심이 담긴 사랑이었습니다. 내가 어느 학교를 나오고 무언가를 특별하게 잘 하고 뛰어난 어떤 것이 있어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이지현”이기에 받은 사랑, 사랑받는 존재라는 확신과 믿음이 지금의 불안하지 않은 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입회 전의 하느님 체험과 초기 양성 기간의 사랑 체험이 저에겐 평생을 통해 간직하고 돌아가야 할 그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이 강렬한 체험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모든 사람에게 정답으로 다가갈 수는 없겠지만 강렬한 체험의 한 부분이 되길 청하며, 오늘도 하느님 사랑 안에서 열정적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작성 : 2014년 8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