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심회 역사

아시아 성심수녀회 역사 개괄

아시아의 부르심은 마들렌 소피 바라 수녀님이 중국에 성심수녀회를 세워 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18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요청은 그 후 여러 번 거듭되었지만 수녀님께서 생전에 그 일을 이루지 못했고, 사실 1926년에야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1908년은 소피 수녀님의 시복식이 있었던 해인데, 나중에 2000여 명의 수녀들이 프랑스에서 추방되는 일을 겪게 되는 마벨 딕비 총원장 수녀님은 자신도 콩플랑을 막 떠나려는 때, 예수회와 성심수녀회에 일본의 고등 교육을 담당할 교육기관을 설립해 달라는 교황 비오 10세의 요청에 응답을 하였습니다. 만일 성심수녀회가 프랑스를 떠나야 한다면 동양으로 가야 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일본 1908년

딕비 총원장께서는 생전에 프랑스 땅에서 죽은 씨앗의 첫 열매들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 즉  프랑스인 관구장인 아멜리 살몬 수녀와 함께 호주로부터 네 명의 수녀를 (세 명은 아일랜드 수녀, 한 명은 뉴질랜드 수녀) 일본으로 파견하였는데, 아멜리 수녀는 그 후 그들이 잘 정착하는 것을 볼 정도로 동경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첫 번의 창립 멤버들은 다른 수녀들에 의해 보강이 되었는데 그리하여 1912년경에는 아일랜드인, 프랑스인, 벨기에인, 영국, 독일인이 합쳐진 국제 공동체로 30명이 넘는 회원이 있었고 또 사도직도 번창하게 되어 오늘날에는 국제 학교, 6,300명 학생의 대학교, 사범학교, 산코쵸, 오바야시, 수소노와 삿뽀로의 중등학교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의 인구는 일본 인구 중 1% 보다 적지만, 지적이고 영성적 특징을 지닌 가톨릭 교육은  일본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1967년 총회 이후부터 교회와 사회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의 사도직이 다양해 지기는 하였지만 창립 시초부터 형식 교육은 우리의 주된 사도직이었습니다. 상담, 피정, 증가하고 있는 이주민들에 대한 사도직, 노숙자, 병들고 연로한 사람들,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사도직 등 생명을 양육하는 여러 방법들을 찾는  모색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1939년 영국 관구로부터 설립된 인도 관구와, 1989년 모원으로부터 시작된 인도네시아를 제외하고, 일본은 실로 아시아라는 나무의 줄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이 계속 투입되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일본인, 한국인, 필리핀인 성소자가 생겨났고, 일본에서 1926년 중국으로 가지를 뻗어나갔고, 1956년에는 한국으로,  중국에서 1952년 추방된 지 8년만인 1960년에는 대만으로, 그리고 1969년에는 필리핀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긴 시간 동안 국제성은 우리 공동체의 강한 특징이 되었고, 이 국제성이 성심수녀회의 다른 지역과도 가까이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브리짓 키요 (1909-2007) 수녀님은 그분 특유의 비전과 ‘회원 원정’으로 다른 지역에까지 널리 알려졌는데, 키요 수녀님은 다른 지역의 성심수녀회 회원들이 극동으로 와서 성심수녀회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사실 1908년부터 적어도 23개국 출신의 200여 명의 회원들이 일본 관구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한국, 대만, 필리핀이 설립되고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게 됨에 따라, 각각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인적 교류와 재정적 지원이 있었지만, 일본 관구는 각 나라의 고유함을 존중하며, 다음 세대의 성장을 조용히 지켜 보는 할머니 같은 존재로 멀리서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지금 100년이 된 일본 관구는 역사의 새로운 시점에 와 있습니다. 2008년 1월 18일, 100주년 기념 미사에서 코코 나가노 수녀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00살이 된 사람이 자신의 나이에 맞게 살듯이, 지난 100년 동안 일본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업적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 왔는데, 이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젊었을 때 초창기 수녀님들의 깊은 신앙과 활동적인 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비그리스도교 국가인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도 우리가 받은 바를 나누려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연 재해나 전쟁 때문이 아니라 세계의 빠른 변화와 수녀님들의 연로화 때문에 약간 정지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한 시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며, 더 관상적으로 일하는 것을 배우려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와 성심수녀회의 역사가 약간 속력이 떨어지는 시기에 와 있지만, 우리를 위축시키는 것들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약점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넘치는 희망과 신뢰를 두고 있으며 찬미의 마니피캇을 부릅니다. 오늘부터 새로운 눈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고, 예수 성심의 영광을 위하여 더 큰 신뢰와 감사함으로 일하도록 합시다.”

중국 1926년

일본 밖에서 나와 중국으로 진출한 첫 시도는 1926년이었습니다. Mary Sheldon 수녀님을 비카 (관구장)으로 모시고 극동관구가 처음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상해의 프랑스 거주 구역에 우리는 국제학교, 초등학교, 중등학교와 오로라 여자 대학을 같은 학교 부지에 두고 개교하였습니다.  중국의 성심회수녀회는 중일 전쟁을 겪었고 (1937-1945), 중국 공산당이 땅을 몰수할 때까지 불안이 계속되었는데 수녀들은 1952년까지  강제 출국 당했습니다.  2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성심수녀회가 상해에 있었는데 60여 명의 선교사들이 그곳에서 봉사했고 26명의 중국인이 성심수녀회로 입회했습니다. 그 후 2007년까지 25년 동안, 브리짓 키요 수녀님을 포함하여 수십 명의 성심수녀회 회원들이 여러 대학에서 영어나 일어, 혹은 문학을 가르쳤으며 신학교나 교구 수도회들의 양성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마닐라에 소피아 하우스가 중국인 학생들을 위해 있으며 한국에는 중국인 수련자들이 있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은 씨앗이 새롭고 예상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인도 1939년

1939년 영국관구 수녀님들이 인도에 진출하였습니다. 네 명의 첫 그룹 수녀님들은, 문바이에 대학을 시작해 달라고 문바이 대교구장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입국했습니다. 이 대학을 설립한 주요 목적 중의 하나는 이런 대학이 없으면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회교 여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을 위한 교육 시설을 제공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개교 초기부터 영국 수녀님들은 인도 문화에 대해 지식을 심화하고 그 문화의 진가를 인식하도록 학생들을 격려했습니다. 1956년에 뱅갈로에 수련원을 개원하였습니다.
토착화는 인도 관구에게 큰 도전이 되는 주제였습니다. 1969년 인도 교회가 전국 단위로 세미나를 열었는데 그곳에서 인도 교회의 토착화가 가장 우선 논의되었습니다. 수련원은 1969년 3월에 곧 뱅갈로에서 문바이로 옮겨졌는데 인도의 영성은 양성 프로그램 안에 통합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요가 등 인도식의 기도 방법, 다른 종교 전통에 개방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양성프로그램에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1972년 반다나 수녀님은 다른 몇몇 수녀들과 푸네의 Wantage 수녀회 수녀님들과 초 교파적인 아쉬람을 시작했고, 후에 힌두인들의 순례 장소인 리쉬케쉬에 다른 아쉬람을 시작했습니다.

인도 관구는 수도생활이 토착화되기 위해서는 인도 언어들을 아는 것이 우선적이라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유기서원자들은 수련원에서 나오자 마자 언어 공부를 하도록 보내졌습니다. 유기서원자들은 비그리스도교 기숙사나 일반 가정에서 사는 경험을 하도록 허락이 되었습니다. 봉쇄가 풀리면서 인도 언어에 대한 지식과 사람들 가운데 가까이 사는 공동체에 살지 않겠느냐는 초대가 교회의 토착화 노력에 새로운 추진력을 주었습니다. 인도 언어를 알고 서구화에 영향을 받지 않은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25년 동안 농촌 지역에서 성소자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문화와 영성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인도 성심수녀회의 얼굴을 점차적으로 바꾸었습니다.

한국 1956년

중국에서 추방되어 한국으로 주데레사 수녀님이 첫 교장으로 부임해 온 이래 50년이 막 지난 한국 관구는 60여 명이 넘는 회원이 있습니다. 1975년에 지구로 독립하면서 한국에 수련원이 생겼습니다. 첫 번째  수련장이었던 김재숙 수녀님은 3개월이나 불교 선원에서 지내면서 수련장직을 준비하였는데 그것이 성심수녀회의 영성과 실천을 토착화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 시작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관구는 피정 집, 대학교육, 여자 중.고등학교 , 단기 장기 쉼터, 공부방들을 통한 대안적인 교육,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사도직 뿐 아니라 유기농 공동체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국관구는 민주화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여성 들의 신학적 성찰을 도우면서, 또 교회와 한국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지도자들을 준비시키는 것을 통해, 또한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을 위한  3일, 8일, 40일 피정 지도를 통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해 왔습니다.

대만 1960년

벤지거 수녀님이 타이페이 외곽 언덕 위에 대만 성심회를 시작했습니다.  6명의 설립자 중에 4분이 아직 생존해 계십니다. 루시 후, 로즈 첸, 메리 유엔, 로즈 순이 그분들이십니다. 대만 사람들은 종교적 심성이 강합니다. 주로 불교, 도교나 토착 종교, 그리고 유교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소수이며 가톨릭 인구는 1% 정도입니다. 첫 10년 동안은 대만 국가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성심수녀회는 같은 구내에 지역 사람들을 위해 고등학교, 초등학교를 개교하였고, 국제 학교와 작은 대학도 열었습니다.  그러나 대만이 1972년 유엔으로부터 탈퇴하고 그에 따라 외교 사절과 외국인들이 철수함에 따라 새로 개교한 대학과 국제학교의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녀 공학인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는 계속 성장하였습니다. 대만 성심수녀회가 시작된 이래, 평신도들은 사도직을 수행하는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데, 그들은 성녀 마들렌 소피의 교육적인 비전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모색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성에 목말라하기 때문에 학교 교정에는 피정 센터를 열었습니다. 인근에 있는 천주교 신자들을 위해 본당도 가지고 있으면 몇몇 회원들은 상담이나 인성 발달을 위해 워크숍을 주기도 하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사회사업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 사목적 필요가 많은 중국 본토에서 피정과 워크숍을 요청 받기도 합니다. 1990년 대만은 지역 (에어리어)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열명의 회원이 세 나라에 퍼져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성소를 보내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필리핀 지구와 한국 관구의 도움으로 성소가 커 나가고 있습니다.

필리핀 1969년

필리핀 지구는 일본을 발판으로 하여 극동관구에 의해 세워졌는데, 일본에서 처음 열 명의 필리핀 수녀님들이 입회를 하여 초기 양성을 받았습니다. 1969년에는 두 명의 필리핀 유기서원자와 한 명의 미국인 수녀님이 일본 관구로부터 필리핀에 성심수녀회를 시작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필리핀 지구를 설립한 비전은 사람들과 삶을 함께 나누며, 특히 대학교 학생들을 염두에 두며, 기존 세상의 기관 안에 스며 들어 가서 사는 유동적인 그룹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성심수녀회 수녀들이 우리 소유의 기관 안에서 살고 일하는 다른 나라의 전통적인 접근과 달리 급진적으로 차별화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나중에는 에어리어가 되었고 1987년 1월 1일에는 지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다섯 공동체가 있으며 몬탈반, 올목, 카타르만 세 군데에서 사도직을 시작했습니다. 이 세 곳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들은 이 사도직들이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이며, 가난하며, 공동체를 바탕으로 하고, 지구 내 다른 회원들과 또 평신도 협력자들과의 협력을 증진시키려는 프로젝트라는 점입니다. 일본 성심학교 동문들과 성심학생들이 끊임없이 이러한 사도직에 재정적인 지원을 해 오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1989년

성심수녀회가 인도네시아로 간 것은 수녀회를 시작할 특별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가 아니라 필리핀 뒤셴 수녀님의 시성식에 즈음하여 총참사들에 의해 하나의 프로젝트로 시작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2억이라고 하는 세계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며 300여 인종과 250개 다른 언어와 17,000개의 섬이 3,500 마일 길이의 이 나라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깊이 종교적인 국가인데, 85%가 회교 신자이고(세계 최대 회교 인구) 5%가 가톨릭, 5%가 개신교이며 나머지 5%가 힌두교나 불교입니다. 비록 회교가 우리 수녀회가 위치한 자바 북부를 포함하여 전역에서 압도적인 종교이기는 하지만,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이 인도네시아 헌법에 정해진 기본적 원칙입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프로젝트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인도, 일본, 미국 국적의 다섯 명의 종신서원자와 다음 종신서원 수련에 가게 될 인도네시아 인 유기서원자 한 명과 두 명의 수련자 (필리핀, 인도네시아) 그리고 동티모르에서 온 청원자 등, 아홉 명으로 구성된 에어리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령대는 20대에서 80대이며, 이들은 인도네시아 맥락에서 우리의 영성을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우리 수녀님들은 내적 생활과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강조하는 우리의 영성과 아주 가까운, 인도네시아인들의 깊은 종교적 감수성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관한 일들은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데, 더 세속적인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곳 수녀님들은 가톨릭, 회교, 국립 교육 기관에서 가르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일하고, 또한 기도와 상담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교구의 삶에 참여하고, 회교, 기독교 간의 종교 대화에도 관여하고 있으며, 손님을 맞아 들이고, 그 외의 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수녀님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이들이 운영하는 기관이나 단체에서 일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문화 간의 대화는 국제 양성 프로그램이나 다른 나라로부터 온 많은 이들을 환대하고, 매일의 공동 삶을 함께 사는 것을 통해, 국가의 경계를  넘고 있습니다.

2008년 아시아 대륙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시아 지역 수녀회 설립 초창기의 국제성은, 각 나라에 성심수녀회를 설립한 것 뿐 아니라 그들의 국가적인 정체성을 세울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습니다. 최근까지 학생들 교류나, 몇몇 워크숍, 또는 유기서원자들의 국제 체험 외에는 각 나라 간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문화가 너무 다른 점들, 지리적으로 너무 멀다는 인식이 강해 공통적으로 함께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각 나라가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유대를 강화하고 싶다는 갈망이 커져 가고 있습니다.
2007년 9월 아시아 관구장들의 모임은 하나의 전환점이었고 상징적인 일이었습니다. 코코 나가노 수녀님의 말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국경과 문화, 종교, 국가적 상황을 넘어 우리의 차이점으로부터 배우고 우리가 아시아인으로 가지고 있는 공통 영성을 재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세상이 점점 작아지면서, 우리의 관계도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초창기 일본에 성심수녀회를 시작하기 위해 많은 나라로부터 선교사들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이제는 아시아의 성심수녀회 수녀들이 다시 하나가 되어 국제 성심수녀회를 풍요롭게 하고 더 살아 있게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느낍니다.”

아시아 대륙이 점점 지구촌에서 중요하게 되고 있는 이 때 성심수녀회 아시아 지역은, 국민들의 필요에 관대하게 응답하려고 열의에 차 있으며, 새로운 희망으로 국제 성심회를 축복하는 가운데 미래를 향하여 얼굴을 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