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안에서 자기 미래를 결정하려는 젊은 분들께,
성탄이 다가오고 있다. 아기 예수님은 2,000여 년 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우리는 매해 이 날을 기념하면서 우리 자신도 새로 태어나기를 함께 염원하고 있다. 물론 성탄이 아니더라도, 나는 내면에서 늘 새로운 아기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다.
오늘 나는 나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지니고 있는 젊은 분들, 특히 자기 인생의 미래 방향을 신앙 안에서 결정지으려는 젊은 여성들을 향하여, 이 글에서 나의 신앙과 수도성소 여정을 소박하게 나누고 싶다.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나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신앙생활의 일부가 건드려지고, 내면에 새로운 아기가 탄생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내게는 크게 기쁨이 될 것이다.
나는 한국 나이로 26세인 1980년 봄에 성심수녀회에 입회하였고, 1983년도 여름에 원효로 성당에서 첫서원, 그리고 1992년 초에 로마에서 종신서원을 하였다. 그러니 종신서원을 한지도 곧 22년이 되어간다. 교육을 사명으로 하는 성심수녀회 안에서 그 동안 내게 맡겨진 일은, 초기에는 여고생들, 여대생들과 더불어 지내는 것이었고, 이후에는 성인들(평신도 지도자들), 그 다음으로는 남녀수도자들, 최근에는 연세가 어느 정도 있으신 4,50대 이상의 여성수도자들을 교육의 장에서 만나는 일이다. 수도회 안에서 내 나이의 변화와 더불어, 내게 맡겨진 사람들의 나이도 차차 달라진 것은, 삶에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나의 부모님은 조부모님들과 더불어 오랜 세월 만주 연길에서 살아오셨다. 그곳 지역은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베네딕도 수도회가 선교를 맡고 있는 연길교구였는데, 부모님들께서는 베네딕도 수도회 독일인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에게서 가톨릭 신앙을 배워 익혀오셨고 어릴 적 교육도 받으셨다. 해방 이후 부모님들께서 남한으로 내려오셨고, 한국 전쟁이 끝난 2년 뒤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아흐레 만에 서울 신당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어린 시절의 내 모든 기억들은 거의 성당 마당과 더불어 떠오른다. 미사 때 제대를 향하여 돌아서시어 주로 뒷모습만 보이시던 신부님, 이따금 돌아서시어 팔을 벌리시고 큰소리로 무어라고 외치시면, 신자들도 응답하던 그 알 수 없던 말들(라틴어), 깃이 큰 모자를 쓰신 수녀님께서 긴 수도복을 치렁거리며 제대 위를 왔다 갔다 하시던 모습, 성체 강복 때의 신비한 분향 냄새와 모두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면 들리던 (긴장되면서도 신기하던) 종소리, 성당 어린이 놀이터 마당 주변에 피어있던 예쁜 방울 꽃, 작은 그네와 미끄럼, 유리창 밖에서 들여다 본 유치원의 각종 장난감과 인형들, 해마다 이 맘 때면 수녀님이 준비해놓으시던 아기예수님 구유… 미사가 끝나면 그 앞에서 조배 드리자고 가까이 나를 꼭 데려가시던 엄마.
사실 돌아보면, 나의 유년기에는 그냥 뜻도 모르면서 일상범주 안에 기도, 미사, 성당 다니는 것이 생활화되었던 것 같다. 아침, 저녁으로 가족들이 모여 방벽에 달아놓은 십자고상 앞에서 조과, 만과(아침기도, 저녁기도)를 바쳤는데, 내 귀에는 ‘조가, 망가’라고 들렸고, 커서야 그 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도 숙제를 하던 채로 잠이 들면, 엄마는 나를 다시 자리에 눕히시기 전에, “효성아, 자기 전에 기도해야지?!”하고 잠깐이라도 나를 흔들어 깨우셨다. 내가 영 졸려 하면, “영광송만… 성부와만… 우리 효성이 착하지?!”하셨던 엄마 모습이 이즈음도 종종 떠오른다. 수녀가 된 지금에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날의 끝 대화를 꼭 주님과 나누는 것이, 어쩌면 (수녀원의 교육과정에서도 배웠지만) 그때 들였던 습관에서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자라던 내가 신앙에 대하여 크게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은 실상은 고둥학교 시절이었다. 머리가 크면서부터, 언제인지 나는 이전에 주일학교에서부터 듣고 배운 모든 교리들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예수님의 기적 행적 이야기나, 본당 신부님의 해설 등에 만족감이 없었고, 내 머리에서 파악하는 이치에는 그 모든 것이 도무지 맞아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고 2 때, 한번은 주일 미사에 가던 길에서 계속 질문이 떠올라, 그 길로 그냥 되돌아 오려 했던 적도 있었다. 즉, 신의 존재를 나 자신이 어찌어찌 머리로 따져 보았자 도무지 헛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가톨릭 학생회 활동을 즐기면서도, 내 근원적인 내면의 질문에는 어떤 만족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서, 성서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창세기 공부를 처음 하면서, 그룹에서 공부하고 매주 말씀에 대한 생활 묵상을 나누고, 방학이면 성서 연수를 받게 되었는데, 그제서야 내 머리에서도 주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왠지 만족감도 일어나면서, 생활 안에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안목도 그 당시에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 계속 이어 출애굽기 공부도 하고, 또 나도 말씀의 봉사자로 작은 그룹을 맡아 책임감을 느끼며, 더 공부하고 묵상 나눔을 하게 되었다. 나는 점점 더 흥미를 느껴 신약성서 공부도 하면서,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알기 시작하였는데, 그때는 벌써 대학교 4학년이 되어 버렸다.
이제 나는 내 삶의 방향을 정하여, 어떤 선택의 길에 들어서야 했다. 외적으로는 직장에도 다녔고, 친구들과도 만나고 어울려 다녔지만(그룹 친구나 개인 친구), 지금 돌아보면, 당시 나의 내면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질문하며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과연 삶에서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일까?” 나는 결국 ‘나라는 존재는 우주 발생 이래로 유일하게 단 한번의 존재로 태어났다가 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랐고, 또한 시편 139편 “주님, 당신은 저를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1절)는 말씀이 나를 한사코 떠나지 않았었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저를 에워싸시고…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4절, 7절) 나는 주님께서 나보다도 더욱 나를 잘 알고 계시다(23절)는 마음에서, 주님께 내 자신을, 내 인생길을 전부 맡기기로 다짐하게 되었다. “저를 영원의 길로 이끄소서”(24절) (지금 돌아보면, 그 당시에 나는 혼자 내면에서 인생 방향을 선택하느라 식별의 기간을 거의 2년 정도 거친 것 같다. 가장 마음이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내가 가닥을 잡았다고 여겨진다.)
그 당시 나는 직장으로 외국어교육 기관에 2년간 근무 중이었는데, 일단 (삶의 방향에 대하여) 마음을 먹으니 편안했고, 그래서 내가 알던 성심회 수녀님 한 분을 만나서, 그분께 나의 마음을 전부 말씀 드렸다. 수녀님은 지그시 웃으시면서 내 말을 깊이 들어주시더니, “오랜 동안 길을 찾느라 수고했어요.” 하시고는 당신도 오랜 동안 눈 여겨 보셨는지 나를 곧 수녀회 성소담당자에게 소개시켜주셨다. 그 이후로 나는 몇몇 가지 절차에 따라서, 수녀원에 와서 기도도 드리고, 책임자도 만나고, 여러 서류에 응답도 하였다. 그런 뒤, 나는 성심회에서 입회를 하도록 허락을 받았고, 내가 살던 삶의 모든 방식을 제쳐두고 마음이 즉시 성심회로 줄달음쳤다. 이 세상 모든 것을 그대로 놓고, 주님을 따르는 길에 금새라도 들어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돌아보면, 어디에서 그런 결단의 용기가 솟구쳐 올라왔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한 젊은이가 이런 길에 들어설 때의 용기를 마치 ‘달나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때 들어가는 에너지만큼이나 큰 힘’이라고 표현한 것을 읽은 일이 있다. 어쩌면 예수님을 따르려고 그물도, 부모도, 모든 것을 버렸던 제자들의 내면에서도 이런 역동이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우리들이 성경에서 읽듯이,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제자들이기는 했지만…
성심회 입회 이후의 삶이 내게 결코 쉬웠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수련 초기에 나는 무지 행복했다. 서로 돌아가며 밥하고, 큰집 청소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쉽지는 않았어도, 매일 기도하고, 성가 부르고 하는 등등이 내게 기쁨을 주었다, 적어도 6개월간은… 그러나 24시간 함께 사는 수련기 공동생활에서는, 가장 먼저는 나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또한 이처럼 다른 자매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도 함께 있었다. 더구나 종종 식탁에서 듣는 사회 사건들과 인간 현실들에 관한 이야기가, 때로는 입회 전에는 내가 듣도 보도 못한 내용들이 있었는데, 참으로 황당해지기도 했다. (비교적으로 가정에서 큰 어려움을 모른 채 자라왔던) 내가 하필이면 입회하던 해, 광주 사태가 일어났고, 그 이후로 우리 사회의 각종 사회적 이슈들은 나를 많이 혼란에 빠지게 했다.
특히 나는 첫서원을 하고 나서도, 이런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신앙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있어서 많은 혼란들을 겪었다. “하느님이 과연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모순들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도 기억하는 KAL기 폭파 사건, 버마 아웅산 사건 등… 수많은 인명이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죽음을 당하는 사건들이었다. 그밖에 내가 더 가까이 알게 된 여러 가지 교회 내부 문제들로, 나는 많이 힘들어했고, 나에게 이해가 갈만한 아무런 틈이 없어지자, 나는 바닥치기를 해야 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제기했었던 ‘신의 존재 문제’를 또 다른 상황과 맥락 안에서 자신에게 던져야 했고, 그러다가 차차 내면의 싸움에 지쳐, 나는 “안 계시는 하느님과 내가 어찌 싸우랴?”에까지도 이르게 되었다. 결국 ‘안 계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부재’를 오랜 동안 묵묵히 견디어 내야만 했는데, 돌아보면 그 모든 동안에도 성심회 선배수녀님들은 큰 관대하심으로 나의 여정을 지켜보며 함께해 주셨다. 이분들의 큰 사랑이 아니었다면, 신앙 안에서 이분들의 기다림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수도성소의 여정에서 아마도 중도하차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몇 년이 고통스럽게 지나던 어느 날, 나는 십자가의 예수님 위에서, 침묵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그냥 단숨에 터득하게 되었다. 말도 없어지고, 이론도 없어졌다. 모든 질문도 사라졌다. 그냥 사랑이다! 극도의 고통이 있는 그 자리에, 극도의 사랑이 그냥 있다는 사실 뿐이다. (알고 보니, 이것은 바로 수녀회 회헌에서 ‘성심수녀회의 목적과 사명’ 첫 단락 내용과 같다. “하느님께서는 죄로 상처받은 이 세상에 당신의 자비와 신의가 빛나게 하셨다.”) 나는 이런 체험 이후에, 내면의 안정이 생겨났고, 어느덧 수녀회의 종신서원 신청과 허락의 절차를 거쳐, 성심회 내에서 종신서원을 하였다. 그 이후로 내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죄스런 현실에 대하여, 지난 날들처럼 그토록 철저히 무지하지는 않다. 적어도 세상의 죄스러움이 곧 내 안의 죄스러움과 같다는 것, 죄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사랑이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요, 생명력이라는 것을 나는 믿고 확신하고 있다. 나는 성심회 창립자인 성녀 소피 바라 수녀님의 교육적 확신과 미대륙 첫 선교사인 성녀 필피핀 뒤셴 수녀님에게서 많은 용기를 얻어낸다. 이분들은 세상의 현실, 고통, 분열을 철저히 겪어내셨으며, 이것을 이기는 방법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을 확신하신 분들이다. 그래서 한 사람을 사랑으로 교육해내는 일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살아가셨다. 나는 이런 선배 수녀님들의 삶이 더 이상 꿈같은 이상이 아니라 철저한 현실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더욱 생생한 존경심을 지닌다. 이는 오늘 내게도 적용 가능한 삶의 방식으로서, 내 신앙과 수도성소 여정의 핵심을 이룬다.
인생의 길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감히, 나는 신앙 안에서 격려를 보낸다. 오늘 그대의 삶이 어렵고 힘들게 여겨질지라도, 사회가 캄캄하여 그대를 혼란케 할지라도, 만일 그대가 끊임없이 신앙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든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의미가 그대의 손에 잡히게 될 것이니, 부디 지치지 말기를! 주님께서는 그대보다 그대 자신을 더욱 잘 알고 계시며, 생생한 사랑의 힘이시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작은 아기로 우리 가운데 태어나신다. 축 성탄
(작성 : 2014년 12월 18일)